요동군(遼東郡)

 

이 글은 요동군과 관련된 기록들을 모두 끌어모아 정리한 글이다. 그러므로 빠져 있는 기록이 발견되면 가감없이 추가할 예정이다.

 

목차

 

<요동군 변천사>

  1. <초기 요동군 변천사>
  2. 전한 유주 요동군
  3. 신 요동
  4. 후한 유주 요동군 요동군을 청주에 넣었다가 후에 복구
  5. 고구려&오환 요동
  6. 후한 유주 요동군, 요동속국
  7. 선비 제국 요동
  8. 공손씨 평주 요동군
  9. 조위 유주 요동군
  10. 서진 평주 요동국
  11. 모용씨 요동
  12. 전연 요동
  13. 후연 요동 → 요동군 이동 <요동군 변천사 2>
  14. 고구려 요동
  15. 당 요동
  16. 발해 요동
  17. <요동군 이후 변천사>

 

<요동군 변천사 2>

  1. 북연 요동
  2. 북위 영주 요동군 → 요동군 이동 <요동군 변천사 3>

 

<요동군 변천사 3>

  1. 동위 남영주 요동군

 

초기 요동군 변천사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땅이라서 기자 8조의 가르침과 풍속이 남아 있는 것이 많다.[각주:1]

 

응소가 주석하기를 "지리지에서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수도였다."라고 하였다.[각주:2]

 

불내, 둔유, 대방, 안시, 평곽, 안평, 거취, 문성 등 모두 한의 2군<요동군과 낙랑군>에 속하였던 현들은 바로 조선, 예맥, 옥저의 땅이었다.[각주:3]

 

연 요동

 

서기전 3세기 초 연(燕) 장수 진개가 동호를 격파하니 동호가 1000여 리 물러났다.[각주:4]

 

서기전 3세기 초(燕)이 장수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게 하여 2000여 리의 땅을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마침내 약해졌다.[각주:5]

 

  • 요동군에 속한 현 가운데 문과 번한이 있었다. 번한현에 패수가 흘렀다.[각주:6]

 

(燕)이 전성할 때(서기전 3세기 초) 진번(혹은 막[각주:7])과 조선을 편입해 다스리니 관리를 두고 장과 새를 쌓았다.[각주:8]

 

  • 안사고가 말하기를 전국시대에 연(燕)이 이 땅을 얻어 다스렸다고 하였다.[각주:9]

 

연이 장성을 쌓고 조양<상곡군>에서 양평<요동군>까지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등 5군<연오군>을 설치하여 호(胡)를 막았다.[각주:10]

 

(서기전 5세기) 진(晉) 양자가 구주(句注)를 넘어 대(代)를 격파해 병합하니 이로써 호(胡), 맥(貉)과 이어졌다. 진(晉)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질 때 조(趙)는 대(代)와 구주(句注)의 북쪽을 차지하였다.[각주:11]

  - 구주 : 산의 이름으로 안문(군)에 있었다.[각주:12]
  - 맥 : 맥은 곧 예이다.[각주:13]

조(趙)는 동쪽으로 연(燕)과 이웃하고 서쪽으로 진(秦)의 경계와 접하고 남쪽으로 한(韓), 위(魏)와 국경이 얽혀 있고 북쪽으로 호(胡), 맥(貊)과 이어져 있다.[각주:14]

서기전 203년 북맥과 연이 기병을 보내 (서초 패왕 항우와 싸우는) 한왕 유방을 도왔다.

  - 응소가 말하기를 "북맥은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 안사고가 말하기를 "맥은 동북방에 있다. 삼한의 무리가 모두 맥의 종족이다."라고 하였다.[각주:15]

(전한 유주 어양군 백단현) 혁수가 북만이에서 발원한다.[각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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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226년 진(秦)이 연(燕)의 (수도) 계를 공격하였다. 마침내 연 태자의 군대를 격파하여 계성을 취하고 태자 단의 머리를 얻었다. 연왕은 동쪽의 요동을 거두어 그곳의 왕이 되었다.[각주:17]

 

서기전 222년 진이 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연왕 희를 사로잡았고, 돌아오면서 대(代)를 공격하여 대왕 가를 사로잡았다.[각주:18]

 

진 요동

 

(전한 유주 요동군) 진(秦) 때 설치하였다.[각주:19]

(후한 유주 요동군) 진(秦) 때 설치하였다.[각주:20]

(서진 평주 요동국) 진(秦) 때 설치하여 요동군으로 삼았다.[각주:21]

 

서기전 221년 (진이) 천하를 (요동군 등) 36군으로 나누었다. (진 시황의) 땅이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각주:22]

 

진 시황이 요동까지 장성을 쌓으니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렀다.[각주:23]

 

(청 내몽골 과이심부) 진(秦), 한(漢) 때 요동군 북쪽 지역이었다.[각주:24]

 

요동군에 요동새와 요동외요가 있었다. (새와 요는 방어시설<일종의 작은 성과 같은>이었다.)

 

서초 요동

 

서기전 206년 (서초 패왕 항우가) 연왕 한광을 (요동으로) 옮겨 요동왕으로 삼고 연의 장수 장도를 연왕으로 삼아 계에 도읍하게 하였다. 장도가 연으로 가서 한광을 요동으로 쫓아내었으나 한광이 들으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장도가 무종에서 그를 공격해 죽이고 요동까지 다스렸다.[각주:25][각주:26]

 

북맥과 연이 기병을 보내 (서초 패왕 항우와 싸우는) 한왕 유방을 도왔다. 응소가 말하기를 "북맥은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맥은 동북방에 있다. 삼한의 무리가 모두 맥의 종족이다."라고 하였다.[각주:27]

 

전한 요동

 

전한이 건국된 후 다시 요동의 옛 새<진 때 요동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위만조선과) 국경으로 삼아 연에 편입하였다.[각주:28]

 

전한이 일어날 때 그 곳<진 때 요동외요>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니 요동고새<진 때 요동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위만조선과) 국경으로 삼아 연에 편입하였다.

 

서기전 195년 (전한의) 연왕 노관이 배반하였다. 주발이 이를 공격하여 상곡(군) 12현, 우북평(군) 16현, 요서(군)과 요동(군) 29현, 어양(군) 22현을 평정하였다. (연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났다. (연 사람) 위만도 조선으로 망명하니 무리를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 동쪽 (요동)새 밖으로 달려나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 이르렀다.[각주:29]

 

서기전 109년 전한의 사신 섭하가 조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국경의 패수에 이르러 그를 배웅하던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죽이고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니 섭하에게 벼슬을 내려 요동동부도위로 삼았다.[각주:30] 조선왕이 요동도위 섭하를 공격해 죽이니 천하의 사형수들을 모아 조선를 쳤다.[각주:31]

 

서기전 106년 처음으로 13주 자사부를 설치하였다. 유주자사부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서기전 78년 요동오환이 배반하니 중랑장 범명우를 도요장군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응소가 말하기를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하였으므로 도요를 관직의 호칭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각주:32]

 

오환은 정령 서남, 오손 동북에 있었다. 전한이 무제(서기전 141년~서기전 87년)에 이르러 표기장군 곽거병을 보내 흉노의 왼쪽 땅을 격파한 후 오환을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등 5군의 새 밖으로 옮겨 전한을 위해 흉노의 동정을 정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호오환교위를 배치하여 이들을 감독하며 흉노와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오환이 점점 강해지더니 흉노 선우의 가묘를 파해쳐 모돈에 대한 원한을 갚기에 이르렀고, 이에 흉노가 대노하여 동쪽으로 오환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대장군 곽광이 그 소식을 듣고 도요장군 범명우를 보내니 (범명우가) 요동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요격하려고 하였으나 오랑캐들은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대신) 범명우는 오환이 패한 틈을 타 그들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로 인하여 오환이 다시 (전한의) 유주를 노략질하기 시작하였다.

≪후한서≫

 

서기전 75년 요동성과 현토성을 쌓았다. 오환이 다시 새를 공격하니 도요장군 범명우을 보내 이를 공격하였다.[각주:33]

 

요동군 변천사

 

전한 유주 요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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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연 요동

진 요동

서초 요동

전한 연국 요동군

전한 유주 요동군 신 요동

 

  • 5만5972가구, 27만2539명 → 6만 4150가구, 8만 1714명 <후한>
  • 18현 → 11성<현>
  1. 양평 <목사관>
  2. 신창
  3. 안시
  4. 서안평
  5. 망평
  6. 평곽
  7. 번한
  8. 답씨
  9. 거취 → X → 서진 평주 요동군 거취현
  10. 후성 <중부도위 치소> → 106년 이후 현토군
  11. 요양 → 106년 이후 현토군
  12. 고현 → 106년 이후 현토군
  13. 무려<부려 혹은 부리> <서부도위 치소> → 요동속국
  14. 험독 → 요동속국
  15. 방 → 요동속국
  16. 요대<요수> → X
  17. 무차 <동부도위 치소> → X

 

(청 내몽골 과이심부) 진(秦), 한(漢) 때 요동군 북쪽 지역이었다.[각주:34]

(청 내몽골 차로특부) 한(漢) 때 요동군 북쪽 지역이었다.[각주:35]

 

(전한 유주 요동군 망평현) 대요수가 새 밖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1250리를 흐른다. 왕망은 장열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평곽현) 철관과 염관이 있다.

 

(전한 유주 요동군 번한현) 패수가 새 밖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바다로 들어간다<응소가 말하기를 "한수(汗水)가 새 밖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답씨현) 응소가 말하기를 "씨수이다."라고 하였다. 사고가 말하기를 "무릇 씨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그것에서 비롯함을 일컫는 것으로 이름을 정하였다."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거취현) 실위산에서 실위수가 발원하여 북쪽으로 양평현에 이르러 양수으로 흘러들어간다.

 

(전한 유주 요동군 요양현) 대양수가 서남으로 요양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전한 유주 요동군 무려현) 사고가 말하기를 "즉 의무려라고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험독현)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왕 만(滿)의 도읍이었다. 강의 험함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험독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으며 이가 당연히 험독이었다."라고 하였다. 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설이 맞다."라고 하였다.

 

신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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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유주 요동군 신 요동 후한 유주 요동군

 

(전한 유주 요동군 앙평현) 왕망은 창평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서안평현) 왕망은 북안평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문현) 왕망은 문정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요양현) 왕망은 요음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요대현<요수현>) 왕망은 순목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동군 무차현) 왕망은 환차라고 하였다.

 

24년 유림 등이 한단성으로 들어가 왕궁에서 왕랑을 천자로 세우고 유주와 기주에 장수들을 보내니 조국(趙國)으로부터 북쪽 지역, 요동(遼東)으로부터 서쪽 지역이 모두 그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각주:36]

 

25년 광무제가 적을 추격하여 어양군에서 다시 싸워 격파하고 끝까지 추격하여 우북평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에) 적들은 흩어져 요서와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혹은 오환과 맥인의 공격을 받으면서 모두 사라졌다.[각주:37]

 

후한 유주 요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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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요동 후한 유주 요동군 고구려&오환 요동

 

28년 (후한) 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 고구려왕<대무신왕>이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 일을 굳게 지키니 후한의 군사들이 물러갔다.[각주:38]

 

30년 가을 후한이 왕준을 낙랑태수로 삼아 낙랑을 치게 하였다. 왕준이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렀을 때, 낙랑군 삼로 왕굉이 결조사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니 이들을 모두 열후로 봉하였다.[각주:39]

 

45년 선비가 요동을 노략질하였다. 요동태수 제융이 이를 대파하였다.[각주:40]

 

고구려&오환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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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유주 요동군 고구려&오환 요동 후한 유주 요동군

 

49년 1월 요동요 밖의 맥인이<주석에 예맥국 사람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가 장수를 보냈다고 한다.> (후한의)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노략질하니 요동태수 제융이 이를 불러 항복받았다. (혹은 요동태수가 은혜와 믿음으로써 이들을 대접하니 다시 화친하였다고 한다.) 오환대인이 (후한의) 조정으로 왔다.[각주:41]

 

49년 오환대인 학단 등 9000여 명이 무리를 거느리고 (후한의) 궐에 이르렀다. (후한 조정에서) 그 거수들을 책봉하니 제후와 왕이 된 사람이 80여 명이었으며, 이들을 새 내에 거주하게 하니 요동속국, 요서군, 우북평군, 어양군, 광양군, 상곡군, 대군, 안문군, 태원군, 삭방군의 지역에 넓게 퍼져 종족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후한이) 그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지급하는 한편 교위를 설치하여 이들을 감시하게 하니 마침내 후한을 위해 흉노와 선비를 정탐하고 공격하였다.[각주:42]

 

(서진 평주 요동국) 후한 광무제(25년~57년) 때 요동군 등을 청주에 예속하였다. 후에 유주로 되돌아왔다.[각주:43]

 

후한 때 청주와 유주에 요동군과 현토군을 넣어다 뺐다 하며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각주:44]

 

55년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아 후한의 군사를 대비하였다.[각주:45]

 

58년 편하<선비>가 적산<오환>을 격파하고 거수의 머리를 베어 제융<한 요동태수>에게 돌아오니 변방 밖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제융의 위엄이 북방에 퍼져 서쪽에서 무위로부터 동쪽으로 현토, 낙랑에 이르기까지 호(胡)와 이(夷)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니 들판에 풍진이 사라져 변경에 주둔한 군사들을 모두 해산시켰다.[각주:46]

 

후한 유주 요동군

 

진과 전한 때 요동군의 북쪽 지역은 후한 때 부여와 선비의 땅이 되었다.

 

화제 영원(89년~105년)  대장군 두헌이 우교위 경기를 보내 흉노를 습격해 격파하니 북선우가 도주하였고 선비가 이로 인해 그 땅으로 옮겨와 웅거하였다. 흉노의 남은 여러 무리들이 여전히 10여만이었는데 모두 스스로를 선비라 부르니 선비가 이로 말미암마 점점 강성해졌다.

≪후한서≫

 

97년 요동선비가 배반하였다.[각주:47] 선비가 비여<요서군에 속한 현>를 노략질하는데 요동태수 제참이 앉아서 막다가 패하니 옥에 가두어 죽였다.[각주:48]

 

101년 요동선비가 우북평(군)을 노략질하였다.[각주:49]

 

104년 요동서부도위관을 다시 설치하였다.[각주:50]

 

105년 요동의 맥인이 배반하여 (요동의) 6현을 노략질하니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의 오환을 보내 이를 치게 하였다.[각주:51] 요동의 맥인이<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군이라고 하였다.> 요동의 6현을 노략질하였다. 태수 경기가 이를 막으니 고구려군이 대패하였다. 경기가 맥인들을 공격해 격파하였다.[각주:52][각주:53]

 

106년 후한이 요동군 소속 고현현, 후성현, 요양현을 나누어 현토군에 편입하였다.[각주: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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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오환 요동
후한 유주 요동군 선비 제국 요동

 

  • 낙양 동북 3600리

 

  • 6만 4150가구, 8만 1714명 → 5400가구 <서진>
  • 11성<현> → 8현
  1. 양평
  2. 신창
  3. 안시
  4. 서안평
  5. 망평 → 현토군
  6. 평곽 → X
  7. 번한 → X
  8. 답씨 → X
  9. 무려<부려 혹은 부리> → 요동속국
  10. 후성 → 106년 이후 현토군

 

(후한 유주 요동군 서안평현) 위씨춘추에서 말하기를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구려의 별종이 여기에 기인하여 이름을 소수맥이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안제(106년~125년) 때 (요동)서부도위를 (요동)속국도위로 삼았다. 요동군 창려성에 있었다.[각주:55]

 

(요동)서부도위를 (요동)속국도위로 삼고 (창려현에서) 따로 6성을 거느리게 하였다.[각주:56] 창려현은 전한 때 요서군 교려현이며 요서군 동부도위의 치소였다.[각주:57]

 

후한 유주 요동속국

 

옛날 전한 때 요서군 교려 등 3현 & 요동군 부려 등 3현

 

이전 현재 이후

전한 유주 요서군

동부 지역 3현

교려 후한 유주 요동속국 서진 평주 창려군
빈도
도하 모용씨 창려

전한 유주 요동군

서부 지역 3현

부려
험독

 

  • 낙양 동북 3260리

 

  1. 창료 <옛날 요서군 천료현> <속국도위 치소>
  2. 빈도 <옛날 요서군 빈도현>
  3. 도하 <옛날 요서군 도하현> → X
  4. 무려 <속국고성>  X
  5. 험독  X
  6. 방  X

 

110년 도요장군 양근과 요동태수 경기가 속국고성에서 남선우를 공격해 격파하였다.[각주:58]

 

115년 요동선비가 무려현을 포위하였다. 요동선비가 또 부리영<부려영[각주:59]>을 공격해 현령을 죽였다.[각주:60]

 

  • 무려현 : 요동군에 속하였다. 의무려산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
  • 부리영 : 부리는 현의 이름으로 요동속국에 속하였다.
  • 부려영 : 부려는 현으로 요동속국에 속하였다.[각주:61]

 

118년 고구려가 예맥과 함께 현토를 노략질하였다. 현토군은 요동에 있었다.[각주:62]

 

121 봄 유주자사 풍환,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새를 떠나 고구려를 공격해 예맥의 거수를 잡아 죽이고 군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궁<고구려 태조대왕>이 아우 수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광 등을 상대하게 하니 우선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여 광 등이 이를 믿게 하였다. 수성은 험지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군사를 보내 현토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000여 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후한은) 광양군, 어양군, 우북평군, 탁군 등에서 기병 3000여 기를 보내 함께 이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맥인들은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여름 (고구려가) 다시 요동선비 8000여 명과 함께 현토를 공격해 후성현을 불사르고[각주:63] 요대<요동군에 속한 현>를 공격하여 관리를 죽이고 노략질하니 채풍 등이 쫓아가 신창<요동군에 속한 현>에서 싸웠으나 전투중 사망하고 공조 경모, 병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도 몸을 던져 풍을 보호하다가 함께 전사하다. 죽은 사람들은 100여 명이었다.[각주:64] 요동속국도위 방분이 위조된 새서를 받들어 현토태수 요광을 죽였다.[각주:65]. 고구려왕이 부여에 행차해 태후묘에 제사지내고 사정이 어려운 백성들을 위로하고 귀국하였다. 고구려왕이 수성에게 나랏일을 맡겼다.[각주:66] 선비가 현토를 노략질하였다. 가을 궁<고구려 태조대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현토를 포위하였다. 그런데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구원하게 하니 위구태가 후한의) 주군과 함께 힘을 합해 힘껏 싸워 고구려를 격파하고 500여 급을 참수하였다. 이 해 궁<고구려왕>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이 되었다.[각주:67]

 

122년 고구려왕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원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다.[각주:68] 수성이 후한의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현토에 이르러 항복하였다.[각주:69]

 

127년 요동선비가 요동과 현토를 노략질하였다. 오환교위 경엽이 국경의 군사와 오환 솔중왕을 보내 이를 공격해 격파하니 선비가 무리를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러 항복을 원하였다.[각주:70][각주:71]

 

132년 선비가 요동을 노략질하였다. 경엽이 오환의 친한도위 융주외, 솔중왕후 돌귀 등을 보내 새를 나가 선비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선비를) 크게 격파하고 돌아오니 돌귀 등을 솔중왕, 후, 장으로 삼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선비가 후에 요동속국을 노략질하니 경엽이 요동 무려성으로 옮겨가 주둔하며 이를 막았다.[각주:72]

 

146년 8월 고구려왕<태조대왕>이 장수를 보내 후한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게 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아내와 자식을 사로잡았다.[각주:73][각주:74]

 

159년 선비가 요동을 노략질하였다.[각주:75]

 

163년 선비가 요동속국을 노략질하였다.[각주:76]

 

선비 요동

 

이전 현재 이후
후한 유주 요동군 선비 제국 요동 공손씨 평주 요동군

 

166년 남흉노, 오환, 선비가 후한 변경의 9군을 노략질하였다. (선비가) 마침내 기병 수만 명을 나누어 후한 변경의 9군으로 들어가 관리들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후한이 장환을 다시 보내 선비를 쳤으나 선비는 새를 나가 떠나버린 후였다. 후한 조정에서 이를 우려하였으나 능히 통제하지 못하니 마침내 사신을 보내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고 화친하고자 하였다. 단석괴가 후한의 책봉을 받지 않고 노략질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단석괴가 땅을 3부로 나누니 우북평에서 동쪽으로 요동에 이르러 부여, 예맥과 인접하는 곳까지 20여 읍을 동부로 삼고 우북평에서 서쪽으로 상곡에 이르기까지 10여 읍을 중부로 삼고 상곡에서 서쪽으로 돈황, 오손에 이르기까지 20여 읍을 서부로 삼아 각각 대인을 두고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대인들은 모두 단석괴에게 속하였다.[각주:77]

 

168년 선비와 예맥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78]

 

173년 선비가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79]

 

175년 선비가 유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80]

 

176년 선비가 유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81]

 

177년 선비가 (후한의) 변경을 세 방향으로 노략질하였다.[각주:82]

 

184년 후한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왕<고국천왕>이 왕자 계수를 보내 막도록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구려왕이 친히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후한의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 격파하니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각주:83]

 

공손씨 평주 요동군

 

이전 현재 이후
선비 제국 요동 공손씨 평주 요동군 조위 유주 요동군

 

190년 요동태수 공손도<공손탁>가 자립하여 요동후 평주목이 되었다. 요동을 나누어 요서군과 중요군으로 삼고 바다 넘어 동래의 여러 현을 거두어 영주자사를 설치하였다.[각주:84]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였는데 헌제<189년~220년> 때 그 나라 왕이 요동<공손씨>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207년 후한의 조조가 요서에 이르러 3군오환을 쳐서 유성을 도륙하니 원상 등이 요동으로 달아났다. (이 때) 요동선우 속복환과 요서(군), (우)북평(군)의 모든 호족들이 종족 사람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다. [각주:85] 요동태수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를 죽였다.[각주:86] 공손강이 원상의 머리를 베어 후한으로 보내니 공손강을 양평후로 봉하고 좌장군의 벼슬을 내렸다.[각주:87]

 

220년 평곽후 (공손)공[각주:88]

 

221년 요동태수 공손공[각주:89]

 

223년 요동태수 공손연[각주:90]

 

237년 예전에 손권이 바닷길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통하니 (조위가)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조위) 유주자사 무구검<관구검>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선비, 오환과 함께 요동(군) 남쪽 지역에 주둔하게 하는 한편, 새서를 보내 공손연을 소환하려 하니 공손연이 군사를 일으켜 배반하였다. 무구검<관구검>이 진군하여 이를 쳤으나 10일간 비가 내려 요수가 크게 불어나니 무구검<관구검>에게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게 하였다. 우북평오환 선우 구루돈과 요서오환 도독 솔중왕 호류 등이 예전에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와서 살다가 (이 때) 부락의 무리를 거느리고 조위에 항복하였다. 구루돈이 아우 아라반 등을 보내 궐에 이르러 조공하니 그 거수 30여 명을 왕으로 봉하였다. 공손연은 무구검<관구검>이 돌아가자 마침내 스스로 연왕으로 즉위하여 백관을 임명하고 소한 원년을 칭하였다.[각주:91]

 

238년 조위 사마의가 양평에서 공손연을 공격해 대파하고 요동군, 대방군, 낙랑군, 현토군을 모두 평정하였다.[각주:92] 조위가 공손연을 쳐서 죽이고 또 군대를 은밀히 바다로 보내 낙랑군과 대방군을 거두었다.[각주:93]

 

조위 유주 요동군

 

이전 현재 이후
공손씨 평주 요동군 조위 유주 요동군 서진 평주 요동국

 

240년 요동(군)의 문현, 북풍현 백성들을 바다 건너 제군의 서안현, 임치현, 창국현 경계로 옮기고 신문현, 남풍현을 설치하여 유민들이 살게 하였다.[각주:94]

 

242년 궁<고구려 동천왕>이 서안평<요동군에 속한 현>을 노략질하였다.[각주:95]

 

서진 평주 요동국

 

이전 현재 이후
조위 유주 요동군 서진 평주 요동국 X (모용선비가 점령)

 

  • 5400가구 → X
  • 8현 → X

 

  1. 양평 <동이교위 치소> → X
  2. 신창 → X
  3. 안시 → X
  4. 서안평 → X
  5. 문 → X
  6. 거취 <옛날 전한 때 거취현> → X
  7. 낙취 <추가>X
  8. 역성 <추가>X

 

276년 유주 소속 창려군, 요동국, 현토군, 대방군, 낙랑군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다. 선비 모용외를 자사로 삼았다.[각주:96]

 

277년 서진 요동왕 유[각주:97]

 

283년 요동왕 유를 옮겨 동래왕으로 삼았다.[각주:98]

 

285년 모용외가 공을 칭하였다. (모용외가) 또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 부여를 치니 부여왕 의려가 자살하였다. 모용외가 그 나라 국성을 평정하고 1만여 명을 몰아 돌아왔다.[각주:99]

 

286년 선비 모용외가 요동을 노략질하였다.[각주:100]

 

311년 고구려가 장수를 보내 요동군 서안평현을 공격해 취하였다.[각주:101]

 

313년 4월 요동의 장통이 낙랑군과 대방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하였다. 해가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자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백성 1000여 가구를 거느리고 모용외<요동선비>에게 투항하자고 하였다. 모용외는 이들로써 낙랑군을 설치하여 장통을 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각주:102]

 

서진 요동국 폐지 이후 이 지역의 변천사

 

모용씨 요동

 

313년~316년 사이 서진 진군장군 창려요동2국공 모용외[각주:103]

 

317년 동진 원제가 (선비) 모용외에게 가절 산기상시 도독요좌잡이유인제군사 용양장군 대선우 창려공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용외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각주:104]

 

317년 (모용외) 관군장군 좌현왕 망평후 모용황

 

319년 선비 모용외가 요동동이교위, 평주자사 최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각주:105]

 

320년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요동을 노략질하니 모용인이 막아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각주:106]

 

321년 동진 사지절 도독유주동이제군사<혹은 도독유평2주동이제군사> 거기장군 평주목 요동군공 모용외[각주:107]

 

333년 거기장군 요동공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즉위하였다. 아우 모용인이 요동(군)의 평곽(현)에서 배반하였다. ... 모용황이 모용소를 죽이고 사자를 보내 모용인의 허실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가던 도중) 험독(현)에서 모용인을 우연히 만났다. 모용인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모용황의 사자를 죽이고 동쪽 평곽으로 돌아갔다. ... 양평령 왕빙, 장군 손기가 요동으로써 모용황을 배반하니 동이교위 봉추, 호군 을일, 요동상 한교, 현토태수 고후 등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돌아왔다. 모용인이 이에 요좌의 땅을 거의 소유하여 스스로 거기장군 평주자사 요동공을 칭하였다.[각주:108]

334년 동진 사지절 도독유주동이제군사 진군대장군 평주자사 대선우 요동공 모용황 - 모용황이 친히 요동을 쳐서 양평을 이기니 모용인이 임명한 거취령 유정이 성을 들어 항복하였고 신창 사람 장형이 현재를 잡아 이로써 항복하였다. 이에 모용인이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고 요동의 큰 가문들을 극성에 나누어 옮기고 화양현, 무차현, 서락현을 설치하고 돌아왔다.[각주:109]

 

함강<335년~342년> 초 모용황이 모용인을 쳐서 죽이고 돌아왔다.[각주:110]

 

전연 요동

 

372년 부견이 요동에서 모용환을 쳐서 멸하였다.[각주:111]

 

후연 요동

 

385년 (고)구려왕<고국양왕>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보다 앞서 연왕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에 주둔하도록 하였는데, 모용좌가 요동 피습 소식을 듣고 사마학경을 보내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요동과 현토를 함락하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농이 요동군과 현토군을 되찾았다. 연왕 모용수가 모용농을 사지절 도독유평2주 북적제군사 유주목으로 삼아 용성 ... 평주자사 대방왕 모용자를 평곽으로 ... 옮겼다.[각주:112][각주:113]

 

5세기 초 고구려가 요동군을 격파하여 차지한 이후 요서군으로 옮겨진 요동군의 변천사는 이 페이지 아래 <요동군 변천사 2> 참고

 

고구려 요동

 

396년~398년 후연 평주목 요동대방이국왕 구려왕 안<광개토대왕>[각주:114]

 

401년 고구려왕<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을 공격하니 후연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각주:115]

 

404년 (후)연왕 모용희가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각주:116]

 

405년 (후)연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려고 형북에 이르렀다. 그러나 거란의 무리를 보고는 공격을 포기하고 회군하던 중 무거운 수레를 버리고 가벼운 군사들로 고구려를 습격하였다. 후연의 군대는 3000여 리를 행군하여 군사들과 말이 지쳤고 얼어 죽은 사람들이 길에 이어졌다.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각주:117]

 

435년 북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장수왕>[각주:118]

 

고(구)려가 (전 북연왕 문통을) 평곽<요동군에 속한 현>에 살도록 하였다가 북풍<요동군에 속한 현>으로 옮겼다.[각주:119]

 

491년 북위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장수왕>[각주:120]

492년 북위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용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문자명왕>[각주:121]

520년 북위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520년 소량 영동장군 도독영평2주제군사 고구려왕<안장왕>[각주:122]

 

532년 북위 사지절 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안원왕>[각주:123]

 

534년 동위 사지절 산기상시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550년 북제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양원왕>[각주:124]

560년 북제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평원왕>[각주:125]

 

577년 북주 개부의동삼사 대장군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평원왕>[각주:126]

 

581년 수 대장군 요동군공<평원왕>[각주:127]
590년 수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영양왕>[각주:128]
591년 수 개부의동삼사 대장군 요동군공 (고구려왕)

 

624년 당 요동군왕 고려왕 고무<영류왕>[각주:129]
643년 당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보장왕>[각주:130]

645년 (당) 이세적이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토에 이르니 고구려 성읍이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지켰다. ... 제<당 태종>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길 메우는 것을 독려하였다. 군사들이 발착수를 건너는데 눈바람이 사나워 물에 젖어 죽는 자가 많으니 길에 불을 피우도록 하여 이들을 기다렸다. 현토성, 횡산성, 개모성, 마미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 협곡성, 은산성, 후황성 등 모두 10성을 빼앗았고 요주, 개주, 암주 등 3주 백성들을 옮기니 중국으로 들어간 사람이 7만 명이었다.[각주:131]

 

당 요동

 

676년 당이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군고성<옛날 요동군성>으로 옮겼다.

677년 요동주도독 조선군왕 고(보)장을 유민들과 함께 안동부로 돌려보내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699년 발해 건국 이후 안동도호부가 폐지당하였다.

 

발해 요동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니하<패수>를 경계로 삼았다.[각주:132]

 

요 동경 요양부에 요하, 동량하<태자하, 대량수>, 혼하, 사하, 범하, 청하, 패수<니하, 한우락>가 있었다.[각주:133]

 

9세기 발해가 요동성국이 되었다.[각주:134]

 

818년 발해가 남쪽으로 신라 북쪽을 평정하고 많은 땅을 개척하였다. 요 동경 요양부 흥요현은 본래 신라 땅이었다. 발해왕 대인수<선왕>가 남쪽으로 신라 북쪽을 평정하니 여러 부락을 빼앗아 군읍을 설치하였고 마침내 장년현으로 정해졌다. 발해 장년현은 본래 전한과 후한 때 (요동군) 평곽현 땅이었다.

≪요사 지리지≫≪발해고≫

 

요동군 이후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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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 내몽골 과이심부) 진(秦), 한(漢) 때 요동군 북쪽 지역이었다.[각주:135]

 

(청 내몽골 차로특부) 한(漢) 때 요동군 북쪽 지역이었다.[각주: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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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군 변천사 2

 

요서에 있었던 요동군의 변천사

 

북연 요동

 

411년 북연의 창려와 요동 백성 2000여 가구가 북위로 들어가 붙었다.[각주:137]

 

432년 북위<탁발선비> 세조가 북연을 쳤다. 영구군,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 현토군이 모두 항복하니 그곳의 3만여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각주:138]

 

북위 영주 요동군

 

(북위 영주 요동군) 진(秦) 때 설치하였다. 후에 폐지하였다. 정광(520년~525년) 중 복구하였다.

 

  • 고도성 <치소>

 

  • 131가구, 855명 → X
  • 2현 → X

 

  1. 양평 → X (북제)
  2. 신창 → X (북제)

 

영주가 함락된 후 남쪽에 남영주를 설치하였다. 이 페이지 아래 <요동군 변천사 3> 참고

 


 

요동군 변천사 3

 

동위 남영주 요동군

 

  • 565가구, 2634명 → X
  • 2현 → X

 

  1. 태평 → X
  2. 신창 → 북제 려군 신창현 → 수 상곡군 수성현

 

  1. 요사 [본문으로]
  2. 사기 색은 [본문으로]
  3. 통전 [본문으로]
  4. 사기 흉노열전 [본문으로]
  5.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본문으로]
  6. 한서 지리지 [본문으로]
  7. 사기집해 [본문으로]
  8. 사기 조선열전 [본문으로]
  9. 한서 서남이양월조선전 [본문으로]
  10. 사기 흉노열전 [본문으로]
  11. 사기 흉노열전 [본문으로]
  12. 사기집해 [본문으로]
  13. 사기색은 [본문으로]
  14. 사기정의 연소공세가 [본문으로]
  15. 한서 [본문으로]
  16. 한서 지리지 [본문으로]
  17. 사기 진시황본기 [본문으로]
  18. 사기 진시황본기 [본문으로]
  19. 한서 지리지 [본문으로]
  20. 후한서 지리지 [본문으로]
  21. 진서 지리지 [본문으로]
  22. 사기 진시황본기 [본문으로]
  23. 사기 진시황본기 [본문으로]
  24. 청사고 [본문으로]
  25. 사기 항우본기 [본문으로]
  26. 한서 고제기 [본문으로]
  27. 한서 [본문으로]
  28. 사기 조선열전 [본문으로]
  29. 한서 [본문으로]
  30. 사기 조선열전 [본문으로]
  31. 한서 무제기 [본문으로]
  32. 한서 소제기 [본문으로]
  33. 한서 소제기 [본문으로]
  34. 청사고 [본문으로]
  35. 청사고 [본문으로]
  36. 후한서 [본문으로]
  37. 후한서 [본문으로]
  3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39. 후한서 동이열전 [본문으로]
  40. 후한서 광무제기 [본문으로]
  41. 후한서 광무제기 [본문으로]
  42.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본문으로]
  43. 진서 지리지 [본문으로]
  44. 요사 지리지 동경 요양부 [본문으로]
  4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46. 후한서 [본문으로]
  47. 후한서 [본문으로]
  48. 후한서 효화효상제기 [본문으로]
  49. 후한서 [본문으로]
  50. 후한서 효화효상제기 [본문으로]
  51. 후한서 [본문으로]
  52. 후한서 [본문으로]
  5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54. 후한서 지리지 [본문으로]
  55. 후한서 효화효상제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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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후한서 효안제기 [본문으로]
  59.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본문으로]
  60. 후한서 효안제기 [본문으로]
  61.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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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67. 후한서 [본문으로]
  6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69. 후한서 [본문으로]
  70. 후한서 [본문으로]
  71. 자치통감 [본문으로]
  72. 후한서 [본문으로]
  7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74. 후한서 동이열전 [본문으로]
  75. 후한서 효환제기 [본문으로]
  76. 후한서 효환제기 [본문으로]
  77. 후한서 [본문으로]
  78. 후한서 [본문으로]
  79. 후한서 [본문으로]
  80. 후한서 [본문으로]
  81. 후한서 [본문으로]
  82. 후한서 [본문으로]
  8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84. 후한서 [본문으로]
  85. 삼국지 [본문으로]
  86. 후한서 효헌제기 [본문으로]
  87. 삼국지 [본문으로]
  88. 삼국지 [본문으로]
  89. 삼국지 [본문으로]
  90. 삼국지 [본문으로]
  91. 삼국지 [본문으로]
  92. 자치통감 [본문으로]
  93. 삼국지 [본문으로]
  94. 삼국지 [본문으로]
  95. 삼국지 [본문으로]
  96. 진서 지리지 [본문으로]
  97. 진서 [본문으로]
  98. 진서 [본문으로]
  99. 진서 [본문으로]
  100. 진서 [본문으로]
  10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02. 자치통감 [본문으로]
  103. 진서 [본문으로]
  104. 진서 [본문으로]
  105. 진서 [본문으로]
  10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07. 진서 [본문으로]
  108. 진서 [본문으로]
  109. 진서 [본문으로]
  110. 진서 [본문으로]
  111. 진서 [본문으로]
  112. 자치통감 [본문으로]
  11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14. 양서 동이열전 [본문으로]
  11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1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1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1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19. 위서 [본문으로]
  12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29. 구당서 태조본기 [본문으로]
  13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3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32. 신당서 [본문으로]
  133.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134. 요사 [본문으로]
  135. 청사고 [본문으로]
  136. 청사고 [본문으로]
  137. 위서 [본문으로]
  138. 위서 세조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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