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군(遼西郡)

 

목차

 

  1. <요서군 이전 변천사>
  2. 진 요서군
  3. 전한 유주 요서군
  4. 신 요서군, 오환&고구려 요서
  5. 후한 유주 요서군, 후한 유주 요동속국, 선비 요서
  6. 선비 제국 요서
  7. 오환&보해 요서
  8. 조위 유주 요서군, 선비 요서
  9. 서진 유주 요서군, 서진 평주 창려군, 선비 요서
  10. 전연 요서
  11. 전진 요서
  12. 후연 요서
  13. 북연 요서
  14. 북위 영주&평주, 백제 요서, 취덕흥 요서 → 영주 이동 <남영주>
  15. 동위 영주&평주
  16. 북제 북평군, 영주자사 고보녕
  17. 수 기주 유성군&요서군&북평군, 거란 요서
  18. 나예 요서, 고개도 요서
  19. 당 하북도 유주대도독부 영주&평주, 해 요서
  20. 5대 요서, 거란 요서
  21. 요 남경 평주요흥군 영주, 요 중경도 흥중부
  22. 금 중도로 평주&난주, 금 북경로 흥중부
  23. 원 중서성 영평로, 원 중서성 대녕로 흥중주
  24. 명 경사 영평부, 명 영주위, 올량합 태녕위, 몽골 토묵특
  25.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청 내몽골 탁색도맹 토묵특부, 청 직례성 열하도 조양부

 

 

요서군 이전 변천사

 

상 때 백이국<혹은 고죽국>

 

(요 중경도 흥중부) 옛날 고죽국이었다.[각주:1]

(청 내몽골 토묵특부) 옛날 고죽국이었다.[각주:2]

 

상 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고죽에 있었다.[각주:3]

(전한 유주 요서군 영지현) 응소가 말하기를 옛날 백이국이었다. 지금 고죽성이 있다고 하였다. 고죽성이 있다.

(후한 유주 요서군 영지현) 백이와 숙제의 본국. 고죽성이 있다.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본래 상 때 고죽국이었다.

괄지지에서 말하기를 "고죽고성이 (당) 평주 노룡현 남쪽 12리에 있었다. 은<상> 때 제후 고죽국이었다. 성은 묵태씨"라고 한다.[각주:4]

 

춘추전국 때 비여국<비자국>

 

(전한 유주 요서군 비여현) 응소가 말하기를 비자가 연(燕)으로 달아나니 연이 (비자를) 이곳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비자는 본래 (한) (기주) 거록군에 있던 비국<비류><백적>의 왕족이었다. 춘추전국 시대에 비(肥)가 조(趙)에 의해 멸망당하자 비자가 북쪽의 (한) (유주) 요서군 지역으로 이동하여 비여(肥如)국을 세웠다. 비자의 나라라고 하여 비자국이라고도 불렀다.

 

산해경에서 북쪽에 호(胡)라고 하는 부여<불여(不與)>의 나라가 숙신의 나라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춘추좌전에서 노(魯)나라 북쪽에 연나라와 함께 박<혹은 호>, 숙신이 있다고 하였다.

관자가 말하기를 연나라와 함께 발,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하였다.

예기에서 북쪽에 산융, 발, 식신이 있었다고 한다.

 

곽박이 말하기를 "호(胡)와 부여<불여(不與)>는 하나의 나라를 중복하여 부른 것이다. 지금도<3세기 말~4세기 초> 호(胡)<흉노>와 이(夷)<부여 등>의 말이 모두 통한다."라고 하였다.[각주:5]

 

곽박이 살던 시대에 호(胡)는 흉노를 가리키고[각주:6], 이(夷)는 부여, 마한, 진한, 숙신, 왜, 비리 등 10국을 가리켰다.[각주:7]

 

비리국은 숙신 서북에 있으며 말이 200일 정도 가는 거리이다. 양운국은 비리에서 말로 또 50일 거리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 가는 거리이다. 일군국은 막한<구막한국>에서 또 150일 거리이다. 모두 계산하면 숙신에서 5만여 리가 된다.

290년에 이르러 다시 모노국 거수 일지유리, 모로국 거수 사지신지, 우리말리국 거수 가모신지, 포도국 거수 인말, 승전국 거수 마로, 사루국 거수 삼가가 각각 사신를 보내 (서진) 동이교위 하감에게 이르러 귀화하였다.

≪진서 동이열전 비리 등 10국≫

 

연 요서

 

연이 (동호와 조선을 격파하여 수 천리 밖으로 밀어낸 후) 그 땅에 장성을 쌓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등 5군<연오군>을 설치하여 호(胡)를 막았다.[각주:8] <요동군 변천사 참고>

 

요서군 변천사

 

진 요서군

 

서기전 221년 (진이) 천하를 (요서군 등) 36군으로 나누었다.[각주:9]

 

(전한 유주 요서군) 진 때 설치하였다.

(후한 유주 요서군) 진 때 설치하였다.

(서진 유주 요서군) 진 때 설치하였다.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진 때 요서군에 속하였다.

 

당 때 북평군 동쪽 지역 + 유성군이 진 시황 때 요서군의 영역이었다.[각주:10]

 

이전 현재 이후

백이국<고죽국>

비여국<비자국>

연 요서

진 요서군 전한 유주 요서군 ... 당 유성군 ... 청 내몽골 탁색도맹 토묵특부 청 직례성 열하도 조양부
... 당 북평군 동쪽 지역 ...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전한 연국 요서군

 

전한이 건국된 후 안문과 태원으로부터 동쪽으로 요양<요동군에 속한 현>에 이르기까지 연국과 대국으로 삼았다.[각주:11]

 

서기전 195년 (전한의) 연왕 노관이 배반하였다. 주발이 이를 공격하여 상곡(군) 12현, 우북평(군) 16현, 요서(군)과 요동(군) 29현, 어양(군) 22현을 평정하였다. (연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났다.[각주:12]

 

서기전 128년 흉노가 변경으로 대거 들어오니, 요서군으로 들어와 요서태수를 죽이고 어양군으로 들어와 어양태수를 격파하고 한안국을 포위하였다.[각주:13]

 

서기전 110년 (무제가) 태산으로 행차하였다가, 다시 동쪽으로 가서 해상을 돌아보면서 갈석에 이르렀으며, 요서에서 북쪽 변경을 지나 구원에 이르렀다.[각주:14][각주:15]

 

서기전 106년 처음으로 13주 자사부를 설치하였다. 유주자사부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이전 현재 이후
진 요서군

전한 유주 요서군

유성현 등 서부지역

오환&고구려 요서

선비 요서

선비 제국 요서

오환, 보해

전한 유주 요서군

교려현 등 동부지역

후한 유주 요동속국
전한 유주 요서군 신 요서군 후한 유주 요서군

 

  • 7만2654가구, 35만2325명 → 1만 4150가구, 8만 1714명 <후한>
  • 14현 → 5현
  1. 해양
  2. 영지
  3. 비여
  4. 양락
  5. 임유
  6. 누 → X (임유현에 병합)
  7. 빈종<빈도> → 요동속국
  8. 교려<창료 or 창려> <동부도위 치소> → 요동속국
  9. 도하 → 요동속국
  10. 저려 → X
  11. 신안평 → X보해
  12. 유성 <서부도위 치소> → X오환
  13. 호소 → X
  14. 문성 → X

 

(요 중경도 흥중부) (전)한 때 (유주) (요서군) 유성현이었다.

(원 북경로 흥중부 흥중현) 본래 전한 (유주) (요서군) 유성현이었다.[각주:16]

(청 내몽골 토묵특부) (전)한 (유주) 요서군 치소 유성현 땅이었다. 

 

(전한 유주 요서군) 작은 강이 48개로 3046리를 나란히 흘렀다.

(전한 유주 요서군 교려현) 응소가 말하기를 지금의 창려라고 하였다.

 

신 요서군

 

(전한 유주 요서군 영지현) 왕망은 영씨정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비여현) 왕망은 비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임유현) 왕망은 빙덕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누현) 왕망은 선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빈종현) 왕망은 면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교려현) 왕망은 금로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도하현) 왕망은 하복이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저려현) 왕망은 서려라고 하였다.

(전한 유주 요서군 문성현) 왕망은 언로라고 하였다.

 

12년 왕망이 고구려의 군사를 보내 호(胡)<흉노>를 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강제로 보내려 하자 모두 달아났으며 고구려후 추가 일어나 신을 공격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이들과 싸우다 죽었다. 왕망이 엄우에게 명해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고구려 장수 연비[각주:17]>를 속여 그를 오게 하여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고치고 천하에 포고해 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하였다. 이에 맥인들이 국경을 더욱 침범하여 동북쪽이 서남이와 함께 모두 어지러웠다.[각주:18]

 

24년 유림 등이 한단성으로 들어가 왕궁에서 왕랑을 천자로 세우고 유주와 기주에 장수들을 보내니 조국(趙國)으로부터 북쪽 지역, 요동(遼東)으로부터 서쪽 지역이 모두 그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각주:19]

 

25년 광무제가 적을 추격하여 어양군에서 다시 싸워 격파하고 끝까지 추격하여 우북평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에) 적들은 흩어져 요서와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혹은 오환과 맥인의 공격을 받으면서 모두 사라졌다.[각주:20]

 

오환&고구려 요서

 

49년 1월 요동요 밖의 맥인이<주석에 예맥국 사람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가 장수를 보냈다고 한다.> (후한의)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노략질하니 요동태수 제융이 이를 불러 항복받았다. (혹은 요동태수가 은혜와 믿음으로써 이들을 대접하니 다시 화친하였다고 한다.) 오환대인이 (후한의) 조정으로 왔다.[각주:21]

49년 오환대인 학단 등 9000여 명이 무리를 거느리고 (후한의) 궐에 이르렀다. 그 거수들을 책봉하니 제후와 왕이 된 사람이 80여 명이었으며, 이들을 새 내에 거주하게 하니 요동속국, 요서군, 우북평군, 어양군, 광양군, 상곡군, 대군, 안문군, 태원군, 삭방군의 지역에 넓게 퍼져 종족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후한이) 그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지급하는 한편 교위를 설치하여 이들을 감시하게 하니 마침내 후한을 위해 흉노와 선비를 정탐하고 공격하였다.[각주:22]

 

55년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아 후한의 군사를 대비하였다.[각주:23]

 

58년 편하<선비>가 적산<오환>을 격파하고 거수의 머리를 베어 제융<한 요동태수>에게 돌아오니 변방 밖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제융의 위엄이 북방에 퍼져 서쪽에서 무위로부터 동쪽으로 현토, 낙랑에 이르기까지 호(胡)와 이(夷)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니 들판에 풍진이 사라져 변경에 주둔한 군사들을 모두 해산시켰다.[각주:24]

 

후한 유주 요서군, 선비 요서

 

이전 현재 이후

전한 유주 요서군

유성현 등 서부지역

오환&고구려 요서

선비 요서

선비 제국 요서

오환, 보해 모용선비

전한 유주 요서군

교려현 등 동부지역

후한 유주 요동속국

조위 유주 요동속국[각주:25]

(혹은 조위 창려군[각주:26])

서진 평주 창려군
전한 유주 요서군 신 요서군 후한 유주 요서군 조위 유주 요서군 서진 유주 요서군

 

(후한 유주 요서군) 낙양 동북 3300리

 

  • 1만 4150가구, 8만 1714명 → 2800가구 <서진>
  • 5현 → 3현
  1. 해양현
  2. 비여현
  3. 양락현
  4. 영지현 ⇒ 비여현에 병합
  5. 임유현 ⇒ 양락현에 병합

 

87년 선비가 북선우을 격파하여 그를 베었다.[각주:27]

88년 (후한) 시중 두헌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북흉노를 치게 하였다.[각주:28]

 

화제 영원 중<89년~105년> 대장군 두헌이 우교위 경기를 보내 흉노를 습격해 격파하니 북선우가 도주하였고 선비가 이로 인해 그 땅으로 옮겨와 웅거하였다. 흉노의 남은 여러 무리들이 여전히 10여만이었는데 모두 스스로를 선비라 부르니 선비가 이로 말미암마 점점 강성해졌다. ≪후한서≫

 

97년 요동선비가 배반하였다.[각주:29] 선비가 비여<요서군에 속한 현>를 노략질하는데 요동태수 제참이 앉아서 막다가 패하니 옥에 가두어 죽였다.[각주:30]

 

101년 선비가 우북평군을 약탈하고 어양군으로 들어가니 어양태수가 이를 공격해 격파하였다.[각주:31]

 

105년 요동의 맥인이<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군이라고 하였다.> 배반하여 (요동의) 6현을 노략질하니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의 오환을 보내 이를 치게 하였다.[각주:32]

 

109년 남선우가 오환대인과 함께 배반하니, 오원군, 운중군, 정양군, 안문군, 삭방군, 대군, 상곡군 어양군, 요서군, 우북평군 등 10군의 군사를 보냈다. 또 요동태수 경기도 선비의 무리를 거느리고 함께 이를 공격하였다.[각주:33]

 

115년 선비가 대군을 약탈하고 장리를 죽였다. 선비가 상곡군을 약탈하였다.[각주:34]

 

117년 요서선비 연휴 등이 새문<성문>을 불태우고 요서군을 노략질하였다. 오환대인 어질거 등이 연휴에게 깊은 원한이 있었기에 요서군의 군사들과 함께 이를 공격해 대파하였다.[각주:35]

 

119년 선비가 (대군) (마성현) 마성새로 들어와 장리를 죽이니, 도요장군 등준이 군사를 보냈는데 중랑장 마속, 남선우, 요서와 우북평의 병마까지 합하여 (마성)새에서 출병하여 선비를 쫓아가 대파하였다.[각주:36]

 

안제(106년~125년) 때 (요동)서부도위를 (요동)속국도위로 삼았다. 요동군 창려성에 있었다.[각주:37]

(요동)서부도위를 (요동)속국도위로 삼고 (창려현에서) 따로 6성을 거느리게 하였다.[각주:38] 창려현은 전한 때 요서군 교려현이며 요서군 동부도위의 치소였다.

 

후한 유주 요동속국

 

옛날 전한 때 요서군 교려 등 3현 & 요동군 부려 등 3현

 

이전 현재 이후

전한 유주 요서군

동부지역 3현

교려 후한 유주 요동속국 서진 평주 창려군
빈도
도하 선비 요서

전한 유주 요동군

서부지역 3현

부려
험독

 

  • 낙양 동북 3620리

 

  1. 창료 <옛날 요서군 천료현> <속국도위 치소>
  2. 빈도 <옛날 요서군 빈도현>
  3. 도하 <옛날 요서군 도하현> → X
  4. 무려 <옛날 요동군 무려현> X
  5. 험독 <옛날 요동군 험독현> X
  6.  <옛날 요동군 방현> X

 

115년 요동선비가 무려현을 포위하였다. 요동선비가 또 부리영<부려영[각주:39]>을 공격해 현령을 죽였다.[각주:40]

 

  • 무려현 : 요동군에 속하였다. 의무려산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
  • 부리영 : 부리는 현의 이름으로 요동속국에 속하였다.
  • 부려영 : 부려는 현으로 요동속국에 속하였다.[각주:41]

 

132년 선비가 요동을 노략질하였다. 경엽이 오환의 친한도위 융주외, 솔중왕후 돌귀 등을 보내 새를 나가 선비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선비를) 크게 격파하고 돌아오니 돌귀 등을 솔중왕, 후, 장으로 삼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선비가 후에 요동속국을 노략질하니 경엽이 요동 무려성으로 옮겨가 주둔하며 이를 막았다.[각주:42]

 

163년 선비가 요동속국을 노략질하였다.[각주:43] 

 

선비 제국 요서

 

166년 남흉노, 오환, 선비가 후한 변경의 9군을 노략질하였다. (선비가) 마침내 기병 수만 명을 나누어 후한 변경의 9군으로 들어가 관리들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후한이 장환을 다시 보내 선비를 쳤으나 선비는 새를 나가 떠나버린 후였다. 후한 조정에서 이를 우려하였으나 능히 통제하지 못하니 마침내 사신을 보내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고 화친하고자 하였다. 단석괴가 후한의 책봉을 받지 않고 노략질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단석괴가 땅을 3부로 나누니 우북평에서 동쪽으로 요동에 이르러 부여, 예맥과 인접하는 곳까지 20여 읍을 동부로 삼고 우북평에서 서쪽으로 상곡에 이르기까지 10여 읍을 중부로 삼고 상곡에서 서쪽으로 돈황, 오손에 이르기까지 20여 읍을 서부로 삼아 각각 대인을 두고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대인들은 모두 단석괴에게 속하였다.[각주:44]

 

168년 선비와 예맥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45]

 

173년 선비가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46]

 

175년 선비가 유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47]

 

176년 선비가 유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48]

 

177년 선비가 (후한의) 변경을 세 방향으로 노략질하였다. 선비가 요서를 노략질하였다. 요서군의 군사들이 오환과 함께 이를 공격해 격파하였다.[각주:49]

 

오환 요서

 

후한 말<선비 제국이 와해되던 때> 요서오환 대인 구력거와 상곡오환 대인 난루가 각각 왕을 칭하고 요동속국오환 대인 소복연이 스스로 초왕을 칭하고 우북평오환 대인 오연이 스스로 한로왕을 칭하였다.[각주:50]

 

(187년) 중산태수 장순이 배반하여 구력거의 무리로 들어가 스스로 미천안정왕<미천장군 안정왕>이라 부르며 3군오환의 원수가 되어 청주, 서주, 유주, 기주를 노략질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노략질하였다.[각주:51]

 

187년 어양군 사람 장순 등이 군사를 일으켜 배반하였다. 예전에 요서오환 대인 구력거와 상곡오환 대인 난루가 스스로 왕을 칭하였다. 또 요동속국오환 대인 소보연도 스스로 초왕을 칭하고 우북평오환 대인 오연도 스스로 한로왕을 칭하였다.[각주:52][각주:53] 이 해 오환이 어양적 장순 등과 함께 계를 공격해 함락하였다. 장순이 우북평태수 유정, 요동태수 양종, 호오환교위 공기조 등을 공격해 죽이고 비여<요서군에 속한 현>에서 스스로 천자를 칭하며 유주와 기주를 노략질하였다.[각주:54]

 

(공손찬의) 군대가 계중에 이르렀는데, 어양의 장순이 요서오환 구력거 등을 꾀어 배반하여 계중을 빼앗아 다스리며 스스로 장군을 칭하면서 <구주춘추에서 말하기를 장순이 스스로 미천장군 안정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다.> 관리와 백성들을 다스리고 우북평군과 요서속국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이르는 곳마다 격파하였다. 공손찬이 군대를 거느리고 장순 등을 쫓아가 공격하였는데 공이 있어 (벼슬이) 기도위로 올라갔다. 속국오환 탐지왕이 종족 사람들을 거느리고 공손찬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공손찬의 벼슬이) 중랑장으로 올라갔으며 도정후에 봉해졌다. (공손찬이) 진군하여 속국에 주둔하며 5~6년간 호(胡)<오환>와 서로 공격하였는데, 구력거 등이 청주, 서주, 유주, 기주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를 입혀도 공손찬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각주:55]

 

189년 유주목 유우가 어양적 장순을 베었다.[각주:56]

 

사지절 대장군 독유청병 영기주목 완향후 원소

요동속국솔중왕 반하

오환요서솔중왕 답돈

우북평솔중왕 한로[각주:57]

 

207년 후한의 조조가 유성에서 오환을 대파하고 그 답돈을 베었다. <유성은 현의 이름으로 요서군에 속하였다. 지금은 영주의 현이다.>

 

207년 후한의 조조가 요서에 이르러 3군오환을 쳐서 유성을 도륙하니 원상 등이 요동으로 달아났다. (이 때) 요동선우 속복환과 요서(군), (우)북평(군)의 모든 호족들이 종족 사람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다.[각주:58] 요동태수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를 죽였다.[각주:59]

 

조위 유주 요서군, 선비 요서

 

244년 선비가 내부하니 요동속국을 설치하고 창려현을 세워 그들이 살게 하였다.[각주:60]

 

(선비 모용외의) 증조 막호발은 조위 초에 그의 부락을 거느리고 요서군으로 들어와 살았으며, (238년에) 사마의를 따라가 공손씨를 쳤는데 공이 있어 솔의왕의 벼슬을 받고 처음으로 극성의 북쪽에서 나라를 세웠다.[각주:61]

 

서진 유주 요서군, 서진 평주 창려군, 선비 요서

 

이전 현재 이후

선비 요서

선비 제국 요서

오환, 보해 선비 요서 전연 요서 전진 요서 후연 요서 북연 북위 영주
후한 유주 요동속국

조위 유주 요동속국[각주:62]

(혹은 조위 창려군[각주:63]

서진 평주 창려군
후한 유주 요서군 조위 유주 요서군 서진 유주 요서군 북위 평주 땅

 

서진 평주 창려군

 

  • 900가구 X
  • 2현 X

 

  1. 창려 X
  2. 빈도 X

 

서진 유주 요서군

 

  • 2800가구 → 537가구, 1905명 <북위>
  • 3현 → 3현
  1. 해양현
  2. 비여현
  3. 양락현

 

예전에 모용섭귀가 우문선비에게 유감이 있었기에 모용외가 장차 선군의 원한을 정리하고자 하여 (서진에) 표를 올려 우문선비를 공격할 것을 청하였는데 무제<265년~289년>가 이를 불허하였다. (이에) 모용외가 노하여 요서를 크게 노략질하였다. 서진이 유주의 군대를 보내 모용외를 쳐서 비여에서 싸우니 모용외의 무리가 대패하였다. (모용외가) 이후로 다시 창려를 노략질함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각주:64]

 

281년 선비 모용외<혹은 모용섭귀>가 창려를 노략질하였다. 선비가 요서를 노략질하는데 평주자사 선우영이 이를 쳐서 격파하였다.[각주:65]

 

282년 안북장군 엄순이 창려에서 선비 모용외를 격파하고 수만 명을 살상하였다.[각주:66]

 

선비 요서

 

303년 선비 단물진을 요서공으로 봉하였다.[각주:67]

 

304년 유주자사 좌현왕 발해공 단필제, 선우 광녕공<이전 상곡군> 단진, 요서공 단권[각주:68]

 

(선비 모용외의) 증조 막호발은 조위 초에 그의 부락을 거느리고 요서군으로 들어와 살았으며, 사마의를 따라가 공손씨를 쳤는데 공이 있어 솔의왕의 벼슬을 받고 처음으로 극성의 북쪽에서 나라를 세웠다.[각주:69]

 

서진 영가(307년~313년)의 난 때 선비 모용외가 창려 대극성에서 웅거하였다.[각주:70]

 

313년 모용외가 단씨를 공격하여 도하와 신성을 취하고 양락에 이르렀는데 탁발육수가 싸움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갔다.[각주:71]

 

319년 진 평주자사 최비가 달아나 (고구려로) 왔다. 처음 최비가 은밀히 우리나라<고구려>, 단씨, 우문씨에게 말하여 함께 모용외를 치자고 하니 세 나라가 진군하여 극성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모용)외가 성문을 닫고 지키면서 우문씨에게만 고기와 술을 보내니 두 나라<고구려와 단씨>는 우문씨가 (모용)외와 함께 모의한다며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이에) 우문대인 실독관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돌아갔으니 내가 홀로 (싸워) 이곳을 차지하겠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아들 (모용)황을 보내 장사 배억과 함게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고 자기는 대군을 거느리고 이를 따라가니 실독관이 대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최비가 그 소식을 듣고 그의 형의 아들 (최)도를 보내 극성에 이르러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는데 (모용)외가 군사로써 그를 대하니 (최)도가 두려워하며 자백하였다. (모용)외가 이에 (최)도를 돌려보내며 (최)비에게 말하게 하기를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요,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하고 군사를 이끌고 최도를 따라갔다. (최)비는 수십여 기병과 함께 가문을 버리고 달아나 (고구려로) 왔고 그 나머지는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아들 (모용)인을 요동에 주둔하게 하였다. 우리<고구려> 장수 여노가 하성(河城)에 의거하니 (모용)외가 장군 장통을 보내 그를 습격해 사로잡고 그 무리 1000여 가구도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고구려 미천)왕이 수차례 군사를 보내 요동을 노략질하니 모용외가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이를 쳤다. (고구려 미천)왕이 맹약을 원하니 (모용)한과 (모용)인이 이에 돌아갔다.[각주:72]

 

(동진) 원제(317년~322년)가 (모용외에게) 평주자사를 제수하였다.[각주:73]

 

333년 거기장군 요동공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즉위하였다. 아우 모용인이 요동(군)의 평곽(현)에서 배반하였다. ... 모용황이 모용소를 죽이고 사자를 보내 모용인의 허실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가던 도중) 험독(현)에서 모용인을 우연히 만났다. 모용인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모용황의 사자를 죽이고 동쪽 평곽으로 돌아갔다. ... 양평령 왕빙, 장군 손기가 요동으로써 모용황을 배반하니 동이교위 봉추, 호군 을일, 요동상 한교, 현토태수 고후 등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돌아왔다. 모용인이 이에 요좌의 땅을 거의 소유하여 스스로 거기장군 평주자사 요동공을 칭하였다.[각주:74]

 

(요 중경도 금주) (334년) 모용황이 서락현을 설치하였다. - 334년 모용황이 친히 요동을 쳐서 양평에서 이기니 모용인이 임명한 거취령 유정이 성을 들어 항복하고 신창 사람 장형은 현재(縣宰)를 사로잡아 항복하였다. 이에 모용인이 두었던 수재(守宰)를 베고 요동의 대성<큰 가문>들을 나누어 극성에 옮기고 화양현, 무차현, 서락현을 설치하고 돌아갔다.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였다.

 

338년 석계룡이 무리 7만을 거느리고 요서의 단요를 공격해 격파하니 단요가 평강으로 달아났다. 석계룡이 극성에서 모용황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모용황이 이를 쫓아가 수백 명을 죽였다. 석호<석계룡>가 장수 마추를 영지<요서>에 남겨 주둔하게 하였는데 모용황이 마추를 격파해 병합하였다.[각주:75]

 

전연 요서

 

340년 모용황이 석계룡의 장수 석성과 요서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각주:76]

 

341년 연왕 모용황이 당국내사 양유 등에게 유성의 북쪽 용산의 남쪽에 성을 쌓고 종묘와 궁궐을 짓게 하여 용성이라고 하였다.[각주:77]

(요 중경도 흥중부) 모용황이 유성의 북쪽, 용산의 남쪽이 복덕의 땅이므로 이에 용성을 쌓고 궁과 사당을 짓고 유성을 용성현으로 고쳤으며 마침내 천도하여 화룡궁이라고 불렀다.

(청 내몽골 토묵특부) 전연 모용황이 수도를 세우고 용성현이라고 하였다.[각주:78]

 

342년 연왕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하였다.[각주:79]

 

344년 모용황과 선비 거수 우문귀가 창려에서 싸웠는데 우문귀가 대패하여 사막 북쪽으로 달아났다.[각주:80]

 

353년 연왕 모용준이 그의 아내 가족혼씨를 황후로 삼고 세자 모용엽을 황태자로 삼고 용성에서 계궁으로 천도하였다.[각주:81]

 

전진 요서

 

380년 유주를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고 석월을 평주자사로 삼아 용성에 주둔하게 하고 중서령 양당을 유주자사로 삼아 계성에 주둔하게 하였다.[각주:82]

 

후연 요서

 

(요 중경도 흥중부) 모용수가 다시 여기에 거처하였다.

 

385년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에 주둔하게 하였다.[각주:83]

 

385년 연왕 모용수가 노왕 화를 남중랑장으로 삼아 업에 주둔하게 하고 모용농을 보내 열옹새를 나가 범성을 지나 용성까지 달려 군사를 모아 여암을 치게 하였다.[각주:84]

 

385년 연왕 모용수가 모용농을 사지절 도독유평2주북적제군사 유주목으로 삼아 용성에 주둔하게 하고 평주자사 대방왕 모용좌를 옮겨 평곽에 주둔하게 하였다.[각주:85]

 

398년 난한이 (후연왕) 모용보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대선우 창려왕이 되었다.[각주:86]

 

398년 (북위) 광평태수 요서공 원의열이 광평군에서 반란을 모의하다가 처형되었다.[각주:87]

 

399년 (후연) 모용성의 요서태수 이랑이 요서군을 들어 (북위에) 항복하였다.[각주:88]

 

400년 (북위) 재관장군 화돌이 요서에서 노부를 격파하고 그와 그의 아들 노환을 사로잡아 경사로 전송하니 이들을 찢어 죽였다.[각주:89]

 

401년 고구려왕<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을 공격하니 후연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각주:90]

 

402년 모용희가 장수를 보내 (북위의) 요서를 노략질하였다. (북위) 호위장군 숙답간 등이 막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영지를 버리고 돌아갔다.[각주:91]

 

(후연) 모용희는 유주자사로서 영지에 주둔하고 청주자사는 신성에 주둔하고, 병주자사는 범성에 주둔하고, 영주자사는 숙군에 주둔하고, 기주자사는 비여에 주둔하였다.[각주:92]

 

비여와 숙군에 큰 성을 쌓고 구니예를 진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아 숙군을 진무하게 하고, 상용공 (모용)의를 진서장군 유주자사로 삼아 영지를 진무하게 하고, 상서 유목을 진남대장군 기주자사로 삼아 비여를 진무하게 하였다.[각주:93]

 

북연 요서

 

고운<북연왕>이 유기2주목으로서 비여를 진무하였고, 병주자사는 백랑을 진무하였다.[각주:94]

 

(요 중경도 흥중부) 후에 풍발에게 멸망당하였다.

409년 풍발이 창려에서 천왕으로 즉위하였다.

 

418년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니) 정동장군 장손도생과 급사 황문시랑 해관을 보내 정예기병 2만을 거느리고 풍발을 공격하게 하고 또 효기장군 연보에게 명하여 유주에서 요서로 들이쳐 지원하게 하였다.[각주:95]

 

432년 북위<탁발선비>가 북연을 쳤다. (북연왕) 풍문통의 석성태수 이숭과 건덕태수 왕융이 10여 군을 들어 항복하였다. 풍문통의 아들 장락공 풍숭과 그의 동복아우 풍랑, 풍랑의 아우 풍막이 요서를 들어 투항하였다. 풍문통이 장수 봉우를 보내 요서를 포위하였다.[각주:96]

 

북위 영주&평주

 

이전 현재 이후
선비 북위 영주 동위 영주 북제 영주 영주자사 고보녕 수 유성군 수 기주 요서군 유성현
서진 평주 창려군 수 기주 요서군
서진 유주 요서군 북위 평주 동위 평주 북제 북평군   수 기주 북평군

 

432년 (북연에서 끌고온) 조선(현)의 백성들을 (요서군) 비여(현)으로 옮겨 (조선현을) 다시 설치하고 북평군에 편입하였다.[각주:97]

 

북위 평주

 

  • 치소 비여성

 

  • 973가구, 3741명 → 2269가구 <수>
  • 2군 5현 → 1현

 

북위 평주 요서군 → 북제 비여현에 병합[각주:98]

 

  • 537가구, 1905명
  • 3현

 

  1. 비여 <요서군 치소> <평주 치소> → 북제 비여현 → 수 신창현에 병합<586년>[각주:99]
  2. 해양 → 북제 비여현에 병합[각주:100]
  3. 양락 → X

 

 

북위 평주 북평군

 

  • 430가구, 1836명
  • 2현

 

  1. 조선 <432년 이전 요서군 비여현>  북제 신창현에 병합[각주:101]
  2. 신창 → 북제 신창현  수 신창현  수 노룡현 <598년>  수 북평군 노룡현

 

433년 무군대장군 영창왕 건이 군대를 독려하여 요서를 구원하였다. 풍숭을 거기대장군 요서왕으로 삼았다. 요서왕 풍숭이 표를 올려 그의 아버지가 항복하도록 설득하겠다고 요청하였으나 황제가 들어주지 않았다.[각주:102]

 

436년 평동장군 아청과 안서장군 고필을 보내 정예기병 1만을 거느리고 (북연왕) 풍문통을 치게 하고 평주자사 원영도 또한 요서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류하게 하였다. (풍)문통이 일이 급해지자 고려<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였고 고려<고구려>는 대장 갈만로에게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주어 (풍)문통을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풍문통이 고려<고구려>로 달아났다.[각주:103]

 

(북위 영주) 436년 (북연 때 화룡성을) 화룡진으로 삼았다.

 

(북위 영주) 444년 (화룡진을) (영주로) 고쳐 설치하였다.

(수 기주 요서군) 옛날 영주를 설치하였다.

(수 기주 요서군 유성현) 후위<북위> 때 화룡성에 영주를 설치하였다. 건덕군, 기양군, 창려군, 요동군, 낙랑군, 영구군, 용성현, 대흥현, 영락현, 대방현, 정황현, 석성현, 광도현, 양무현, 양평현, 신창현, 평강현, 유성현, 부평현을 거느렸다.

(청 내몽골 토묵특부) 원위<북위> 때 영주의 치소가 되었다.

 

446년 영지현과 함자현을 양락현에 병합하였다.[각주:104]

 

(북위 영주 창려군) 447년 기양군을 창려군에 병합하였다.

(북위 영주 건덕군) 447년 건덕군을 설치하였다.

 

(북위 영주 창려군 용성현) 447년 유성, 창려, 극성을 용성현에 병합하였다.

(북위 영주 창려군 광흥현) 447년 도하, 영락, 연창을 광흥현에 병합하였다.

(북위 영주 건덕군 석성현) 447년 요양, 노, 대락을 병합하여 석성현에 예속하였다.

(북위 영주 건덕군 광도현) 447년 백랑, 건덕, 망평을 병합하여 광도현에 예속하였다.

 

북위 영주

 

  • 치소 화룡성

 

  • 1021가구, 4664명
  • 6군, 14현

 

북위 영주 창려군 → X (북제 때 폐지)[각주:105]

 

  • 201가구, 918명
  • 3현

 

  1. 용성 → 수 용산현 → 수 유성현 → 수 요서군 유성현 <대업(605년~617년) 초 요서군 설치>
  2. 광흥 → X (북제 때 폐지)
  3. 정황 <정광(520년~525년) 말 설치> → X (북제 때 폐지)

 

북위 영주 건덕군 → X (수 때 폐지)[각주:106]

 

  • 치소 백랑성

 

  • 200가구, 793명
  • 3현

 

  1. 석성 <옛날 전한 (유주) 우북평군 석성현> → X (북제 때 폐지)
  2. 광도 → X (북제 때 폐지)
  3. 양무 <정광(520년~525년) 말 설치> X (북제 때 폐지)

 

458년 광녕군 온천궁에 행차하였다가 동쪽으로 순수하며 평주에 이르렀다. 요서군 황산궁에 이르렀다.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았다.[각주:107]

 

466년 정동대장군 풍희를 창려왕으로 봉하였다.[각주:108]

 

478년 창려왕 풍희의 둘째 아들 시흥을 북평왕으로 봉하였다.[각주:109]

 

백제 요서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해 다스리고 백제가 요서를 차지해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각주:110]

 

백제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 때 구려<고구려>가 마침내 요동을 차지해 다스리니 백제도 또한 요서군과 진평군 땅을 차지해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각주:111]

 

백제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함께 모두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진 때 구려<고구려>가 마침내 요동(군)을 차지해 다스리고 백제도 또한 요서군과 진평군 땅을 차지해 다스리며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각주:112]

 

488년 북위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격파당하였다.[각주:113]

 

490년 위로<북위>가 또 기병 수십만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경계로 들어갔다. 모대<백제 동성왕>가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위)로<북위>의 군대를 공격해 대파하였다.[각주:114]

 

최치원이 말하기를 "동해 밖에 3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려<고구려>였고 변한은 곧 백제였고 진한은 곧 신라였습니다. 고려<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 100만으로 남쪽으로 오(吳)와 월(越)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어지럽혀 중국에 큰 해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최치원열전 ---

 

북위 요서

 

517년 청주, 제주, 연주, 경주, 평주, 영주, 사주의 치소에 동양성, 역성, 하구성, 평량성, 비여성, 화룡성, 구원성을 쌓았다.[각주:115]

 

  • 청주 7군 : 제군, 북해군, 낙안군, 발해군, 고양군, 하간군, 낙릉군
  • 제주 6군 : 동위군, 동평원군, 동청하군, 광천군, 제남군, 태원군
  • 연주 6군 : 태산군, 노군, 고평군, 임성군, 동평군, 동양평군
  • 경주 6군 : 안정군, 농동군, 신평군, 조평군, 평량군, 평원군
  • 평주 2군 : 요서군, 북평군
  • 영주 6군 : 창려군, 건덕군, 요동군, 낙량군, 기양군, 영구군
  • 사주 3군 : 영안군, 수용군, 안문군

 

(북위 영주 요동군) 정광(520년~525년) 중 (요동군을) 복구하였다.

(북위 영주 낙량군) 정광(520년~525년) 말 (낙량군을) 복구하였다.

(북위 영주 영구군) 정광(520년~525년) 말 (영구군을) 설치하였다.

 

(북위 영주 창려군 정황현) 정광(520년~525년) 말 설치하였다.

(북위 영주 건덕군 양무현) 정광(520년~525년) 말 설치하였다.

 

북위 영주 요동군 → X (북제 때 폐지)[각주:116]

 

  • 치소 고도성

 

  • 131가구, 855명
  • 2현

 

  1. 양평 <정광(520년~525년) 중 복구> → X (북제 때 폐지)
  2. 신창 <정광(520년~525년) 중 복구> → X (북제 때 폐지)

 

북위 영주 낙량군 → X (북제 때 폐지)[각주:117]

 

  • 치소 연성

 

  • 219가구, 1008명
  • 2현
  1. 영락 <정광(520년~525년) 말 설치> → X (수 때 폐지)
  2. 대방 <정광(520년~525년) 말 복구> → X (수 때 폐지)

 

북위 영주 영구군 → X (북제 때 폐지)[각주:118]

 

  • 182가구, 794명
  • 2현
  1. 부평 <정광(520년~525년) 말 설치> → X (북제 때 폐지)
  2. 영안 <정광(520년~525년) 말 설치> → X (북제 때 폐지)

 

취덕흥 요서

 

(북위 영주) 영안(528년~529년) 말 함락되었다.

 

영주가 함락된 후 남쪽으로 옮겨 설치한 남영주의 변천사는 수서 지리지 상곡군 무수현에 기록되어 있다.

 

수 기주 상곡군 수성현 : 옛날 무수라고 하였다. 후위<북위> 때 남영주를 설치하고 영주를 본떠서 5군 11현을 설치하였다. 용성현, 광흥현, 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하고 석성현, 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하고 양평현, 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하고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하고 부평현, 대방현, 영안현은 영구군에 속하였다. 후제<북제> 때 오직 창려군 하나만 남겨서 영락현, 신창현을 거느리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581년 남영주를 옮겼다. 583년 창려군을 폐지하였다. 598년 수성현으로 고쳤다. 용산(龍山)이 있다. ≪수서 지리지≫

 

524년 북위 영주성 백성 유안정과 취덕흥이 관리 이중준을 사로잡고 영주성에 웅거해 배반하였다. 영주성의 백성 왕악아가 유안정을 베어 이로써 (북위에) 항복하니 취덕흥은 동쪽으로 달아나 스스로 연왕을 칭하였다.[각주:119]

 

526년 (연왕) 취덕흥이 평주를 공격해 함락하고 (평주)자사 왕매노를 죽였다.[각주:120]

 

529년 취덕흥이 영주에서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529년 취덕흥이 북위에 항복을 청하니 영주가 평정되었다.[각주:121]

 

533년 영주자사 조봉, 동형주자사 뇌능승 등이 성을 들어 북위에 항복하였다.

 

동위 영주&평주

 

(동위 영주) 천평(534년~537년) 초 (영주를) 복구하였다.

 

(동위 영주 기양군) 547년 옛날(447년) 창려군에 병합하였던 기양군을 복구하였다.

 

동위 영주 기양군 → X (수 때 폐지)[각주:122]

 

  • 89가구, 296명
  • 2현
  1. 평강 → X (북제 때 폐지)
  2. 유성 → X (북제 때 폐지)

 

북제 북평군

 

북제 때 (영주에서) 오직 건덕군, 기양군, 영락현, 대방현, 용성현, 대흥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수서 지리지 기주 요서군 유성현

 

(평주에서) 조선현을 폐지하여 신창현에 병합하였고, 또 요서군을 폐지하여 거느리던 해양현과 함께 비여현에 병합하였다. ≪수서 지리지 기주 북평군 노룡현

 

(비여현은) 북제 때 북평군에 속하였다.[각주:123]

 

553년 거란이 새를 침범하였다. 황제가 북쪽으로 기주, 정주, 유주, 안주를 순무하다가 북쪽으로 거란을 쳤다. 황제는 평주에 이르러 서쪽 길을 따라 장참으로 향하고, 사도 반상락에게 조서를 내려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동쪽 길로 청산을 향하게 하였다. 백랑성에 이르렀다. 창려성을 지났다. 다시 안덕왕 한궤에게 조서를 내려 정예기병 4천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향하여 거란의 도주로를 끊게 하였다. 양사수에 이르자 더욱 빠르게 행군하여 거란을 습격하였다. 황제가 친히 산봉우리를 넘고 사졸들의 선봉이 되어 지휘하며 분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포로 10만여 명과 온갖 가축 수십만 마리를 얻었다. (반상)락도 청산에서 거란의 별부를 대파하였다. 사로잡은 포로들은 모두 여러 주에 분산 배치하였다. 영주에 이르렀다. 갈석산을 올라 창해를 보았다. 황제가 평주에서 마침내 진양으로 갔다.[각주:124]

 

영주자사 고보녕

 

577년 영주자사 고보녕이 영주에 웅거하여 배반하였다.[각주:125]

 

581년 (돌궐) (가한) 섭도<사발략>가 말하기를 "나는 (북)주 가문의 친족이다. 이제 수공이 자립하여 능히 통제할 수 없으니 어찌 가하돈을 볼 면목이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전 북제) 영주자사 고보녕과 함께 임유진을 공격해 함락하였다.[각주:126][각주:127]

 

582년 고보녕이 평주를 노략질하였다. 돌궐이 장성으로 들어왔다.[각주:128]

 

583년 유주총관 음수가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노룡새에서 출병하여 고보녕을 공격하였다.[각주:129]

 

583년 행군총관 음수가 황룡에서 고보녕을 격파하였다.[각주:130]

 

수 요서

 

(수 기주 요서군) 옛날 영주를 설치하였다.

(수 기주 북평군) 옛날 평주를 설치하였다.

 

이전 현재 이후
북위 영주 동위 영주 북제 영주 영주자사 고보녕 수 유성군 수 기주 요서군 유성현 당 영주
수 기주 요서군 당 연주
북위 평주 동위 평주 북제 북평군   수 기주 북평군 당 평주
수 기주 북평군 땅 당 평주 유성현

 

(당 영주) 수 때 유성군이었다.[각주:131]

(당 연주) 수 때 요서군이었다.[각주:132]

 

(북평군을) 평주로 고쳤다.[각주:133]

 

(수 기주 요서군 유성현) 581년 오직 건덕군과 용성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마침내 다시 건덕군을 폐지하고 용성현을 용산현으로 고쳤다.

 

581년 남영주가 옮겨졌다.[각주:134]

 

(요 중경도 흥중부) 수 때 고보녕을 평정하고 영주를 설치하였다.

(수 기주 요서군) 개황(581년~600년) 초 영주총관부를 설치하였다.

 

586년 비여현을 폐지하여 신창현에 병합하였다.[각주:135]

 

(수 기주 요서군 유성현) 598년 용산현을 유성현으로 고쳤다.

(청 내몽골 토묵특부) 수 때 유성현을 다시 설치하였다.[각주:136]

 

598년 고구려왕이 말갈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를 노략질하니 영주총관 위충이 이를 공격해 물리쳤다. 고조가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한왕에게 명하여 원수로 삼아 고려<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 때 군량이 보급되지 않아 군인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데 군사가 임유관을 나가면서 전염병까지 돌았다.[각주:137]. 이 해 신창현을 노룡현으로 고쳤다.[각주:138]

 

(수 기주 요서군) 대업(605년~616년) 초 영주총관부를 폐지하였다.

(수 기주 요서군 유성현) 대업(605~617년) 초 요서군을 설치하였다.

(평주를) 다시 북평군으로 삼았다.[각주:139]

 

수 기주 요서군

 

  • 751가구
  • 1현

 

  1. 유성

 

(수 기주 요서군 유성현) 대방산, 독려산, 계명산, 송산이 있다. 유수, 백랑수가 있다.

 

수 기주 북평군

 

  • 2269가구
  • 1현

 

  1. 노룡

 

612년 황제가 친히 요동<고구려>을 치니 군대가 (노룡현) 임유에 이르렀다.[각주:140][각주:141] ... 단지 요수 서쪽에서 고려<고구려>의 무력라<무려라[각주:142]>를 빼앗아 요동군 및 통정진을 설치하는데 그쳤다.[각주:143]

 

613년 황제가 다시 고려<고구려>를 치면서 원숙에게 임유를 진무하게 하였다. 양현감이 난을 일으키자 그 아우 양현종이 황제로부터 달아났으며 돌아오던 길에 임유를 지나갔다. 원숙이 그의 작은 아내 위씨를 내보내 양현종을 만나게 하고 연회를 열어 지극하게 대접하였다. 이로 인하여 함께 통모하고 양현종에게 뇌물을 주었다.[각주:144][각주:145]

 

614년 황제가 임유궁으로 행차하여 제사지내고 반란군들을 죽였다. 북평으로 행차하였다.[각주:146]

 

615년 양중서 등이 1만여 무리를 거느리고 북평을 공격하였으나 활공 이경이 격파하고 그를 베었다.[각주:147][각주:148]

 

나예 요서, 고개도 요서

 

고개도가 그의 무리 100여 명과 해곡에서 나와 창주를 노략질하고 무리를 불러모아 수백 명을 얻어 북쪽으로 성과 진을 노략질하니 임유에서 회원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다.[각주:149]

 

616년 나예가 유성태수 양림보를 쫓아내고 유성군을 영주로 고치고 양평태수 등고를 영주총관으로 삼고 나예는 스스로 유주총관을 칭하였다.[각주:150]

 

618년 수 장수 이경이 북평군을 지키는데 고개도가 군사를 이끌고 이를 포위하였다. 수 년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였으나 이경이 스스로 견디지 못하여 성을 (재물 등을 빼앗아) 떠났다. 고개도도 또한 그 땅을 취하고 진격하여 어양군을 함락하니 말 수천 필에 무리가 1만 명이었다. 자립하여 연왕이 되어 어양에 도읍하였다.[각주:151]

 

당 요서

 

이전 현재 이후
수 유성군 당 영주 해 요서 요 중경도 흥중부
수 요서군 당 연주    
수 북평군 당 평주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수 북평군 땅 당 평주 유성현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광녕현

 

618년 수 양평태수 등고가 유성군과 북평군을 들어 항복하니 등고를 영주총관으로 삼았다.[각주:152]

 

(당 영주) 618년 수 때 유성군을 영주총관부로 고치고 요주, 연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유성현을 거느렸다.

(당 연주) 618년 수 때 요서군을 연주총관부로 고치고 요서현, 노하현, 회원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 해 노하현을 폐지하였다.

 

619년 수 때 북평군을 평주로 고치고[각주:153] 임유현과 비여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비여현은 후한 때의 요서군 비여현으로 수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않았다.[각주:154] (이 해에 이르러) 임유현에서 비여현으로 치소를 옮기고 비여현을 노룡현으로 고치고 다시 무녕현을 설치하였다. 이 해 (거란이) 평주로 들어와 노략질하였다.[각주:155]

 

(당 연주) 623년 영주에서 남쪽으로 옮겨 유주성 내에서 맡아 다스렸다.

 

(당 영주) 624년 (영주총관부를) 영주도독부로 고치고 영주와 요주를 관할하게 하였다.

624년 (평주에서) 임유현과 무녕현을 폐지하였다.

 

(요 중경도 흥중부) 당 무덕(618년~626년) 초 영주총관부로 고쳤다가 마침내 영주도독부로 삼았다.

(원 북경로 흥중부) 본래 당 영주성이었다.

(청 내몽골 토묵특부) 당 때 영주도독부의 치소가 되었다.[각주:156]

 

(당 연주) 627년 도독부를 폐지하면서 회원현까지 폐지하였다.

 

(당 영주) 628년 또 창주를 감독하게 하였다.

(당 영주) 629년 또 사주와 숭주를 관할하게 하였다.

(당 영주) 632년 또 순주를 감독하게 하였다.

(당 영주) 636년 또 신주를 감독하게 하였다.

 

641년 한 때 우북평군 석성현 땅에 임유현을 다시 설치하였다.[각주:157]

 

645년 (당 장수) 이적이 진군하여 고구려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9월에 이르도록 이기지 못하니 이에 군사를 되돌렸다. 10월 임유관으로 들어오니 황태자가 정주에서 마중나와 맞이하였다.[각주:158]

 

.

.

.

 

696년 거란적 이진충이 와서 평주를 노략질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각주:159]

 

(당 영주) 697년 거란 이만영에게 함락되었다.

(요 중경도 흥중부) 만세통천 중(697년) 이만영이 (영주를) 함락하였다.

 

697년 임유현을 석성현으로 고쳤다. 석성현은 전한 우북평군 석성현으로 옛날 이름을 취한 것이다.[각주:160]

 

(당 영주) 705년 영주도독부를 유주 경계로 옮겨 설치하고 어양현과 옥전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요 중경도 흥중부) 신룡(705년~706년) 초 영주도독부를 유주로 옮겼다.

 

714년 신성에 있던 (발해 건국 이후 폐지당하였던) 안동도호부를 평주에 설치하였다.[각주:161]

 

(당 영주) 716년 다시 유성으로 되돌렸다.

(요 중경도 흥중부) 716년 (유주에 있던 영주를) 다시 유성에 설치하였다.

 

717년 3월 경술일 예전에 의지하여 유성에 영주도독부를 설치하였다.[각주:162]

 

720년 (거란) 가돌간이 군사를 일으켜 (거란왕) 이사고를 공격하니 이사고가 패하여 영주로 달아났다. 영주도독 허흠담이 안동도독 설태를 보내 용맹한 군사 500을 거느리고 해왕 이대포와 함께 이사고를 도와 이를 치도록 하였으나 전투에서 패하여 이사고와 이대포가 모두 가돌간에게 죽임을 당하고 설태가 사로잡히니 영주가 매우 놀라 두려워하였다. 허흠담이 군을 옮겨 유관으로 들어왔다.[각주:163]

 

(당 영주) 720년 또 어양으로 갔다.

(요 중경도 흥중부) 720년 (영주를) 서쪽 어양으로 옮겼다.

 

(요 중경도 흥중부) 722년 (어양에 있던 영주를) 유성으로 되돌렸다.

 

(당 영주) 723년 또 유성의 옛 치소로 돌아갔다.

 

733년 유주장사 설초옥이 영걸 및 비장 오극근, 오지의, 나수충 등을 보내 정예기병 1만 명 및 항복한 해의 무리를 거느리고 거란를 치게 하여 유관 밖에 주둔하니, 거란 수령 가돌간이 돌궐의 무리를 이끌고 도산 아래에서 막아 싸웠다. 관군이 불리하자 오지의와 나수충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빠져 돌아왔고, 영걸과 오극근은 적을 만나 힘껏 싸웠으나 모두 전사하고 그 휘하 정예기병 6000여 명은 적이 영걸의 머리를 내걸어 보여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거의다 죽임을 당하였다.

 

740년 노룡현을 나누어 마성현을 설치해 수운을 통하였다.

 

742년 영주를 다시 유성군으로 고쳤다.

742년 (평주를) 북평군으로 고쳤다.[각주:164]

 

743년 평주<북평군>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서군고성으로 옮겼다.[각주:165]. (평주<북평군>에) 노룡부와 노룡군(盧龍軍)을 설치하였다.[각주:166]

 

당 하북도 유주대도독부 영주 <혹은 유성군>

 

  • 1031가구, 4732명 <초기> → 997가구, 3789명 <천보(742년~755년) 중>
  • 1현

 

  1. 유성 <옛날 전한 요서군 유성현> → 요 중경도 흥중부

 

당 하북도 유주대도독부 평주 <혹은 북평군>

 

  • 603가구, 2542명 <초기> → 3113가구, 2만 5806명 <천보(742년~755년) 중>
  • 1현 <초기> → 3현 <천보(742년~755년) 중>
  1. 노룡 <옛날 비여현> <평주 치소>
  2. 석성 <옛날 (전한 우북평군 석성현 땅에 설치한) 임유현> → 난주
  3. 마성 <옛날 해양현> → 난주

 

755년 안녹산의 난 (혹은 안사의 난)

 

(당 영주) 758년 (유성군을) 다시 영주로 삼았다.

758년 (북평군을) 평주로 되돌렸다.

 

762년 이회선이 귀순하니 계주자사 평로군유후 유성군사(柳城軍使)로 삼았다.


765년 평주에 유성(군)<柳城(軍)>을 설치하였다.[각주:167][각주:168]

 

해 요서

 

(요 중경도 흥중부) 후에 해(奚)가 웅거하였다.[각주:169]

 

795년 해가 평주를 노략질하니 유제가 청도산에서 이를 격파하였다.[각주:170]

 

.

.

.

 

5대 요서, 거란 요서

 

거란의 땅은 북쪽으로 실위와 접하고 동쪽으로 고려와 이웃하고 서쪽으로 해의 경계이고 남쪽으로 영주에 이르렀다.[각주:171]

 

당 말 이후 유주와 계주가 할거하면서 (유관을)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졌으며 거란이 인해 출전하여 평주과 영주을 얻으니 유주와 계주의 사람들이 해마다 노략질당하는 고통을 겪었다.[각주:172]

 

903년 거란이 유관을 노략질하였다.[각주:173]

 

907년 유인공의 아들 유수광이 그의 아버지와 같이 스스로 유주 평로군절도사를 칭하였다. 그의 형인 평주자사 유수기가 그의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거란에) 투항하였다.[각주:174]

 

913년 (진) 유광준이 (연) 평주를 공격해 함락하고 자사 장재길을 사로잡았다. 유광준이 진군하여 (연) 영주로 들이치니 자사 양정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각주:175][각주:176]

 

923년 (요 태조) 아보기<혹은 안파견[각주:177]>가 남쪽으로 (평주를) 공격하여 그 성을 함락하고 장희숭을 사로잡아 돌아갔다.[각주:178] (혹은 요 대원수 요골이 평주를 함락하고 자사 조사온과 비장 장숭을 사로잡았다.) 요 태조가 평주로 갔다. 평주를 노룡군으로 삼고 절도사를 설치하였다.[각주:179] (예전에 거란에 투항하였던 노문진을) 노룡절도사로 삼으니 노문진은 항상 평주에 거처하면서 해의 기병을 거느리고 해마다 북쪽 변경으로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각주:180]

 

926년 (후당) 유주에서 말하기를 거란 평주 수비장수 유주절도사 노문진이 백성을 거느리고 귀순하였다고 하였다.[각주:181]

 

928년 거란이 (후당) 평주를 함락하였다.[각주:182][각주:183] 거란 평주절도사 노문진이 남쪽으로 귀순하였기에 거란이 장희숭에게 그 직임을 잇도록 하였다. 거란 평주자사 장희숭이 (후당에) 표를 올리고 귀순하였다.[각주:184]

 

요 요서

 

이전 현재 이후
당 영주 해 요서 요 중경도 흥중부 금 북경로 흥중부
당 평주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금 중도로 평주
당 평주 유성현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광녕현 금 중도로 평주 창려현
당 평주 땅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요 중경도 흥중부) 태조가 해(奚)를 평정하였다.

(요 중경도 흥중부) 본래 패주 창무군 절도였다. 사로잡은 연(燕)의 백성들로 성을 세우고자 하여 한지방에게 명하여 그 터를 택하게 하니 이에 유성을 수리하여 패주 창무군 절도라고 불렀다.

(원 북경로 흥중부) 요 태조가 한(漢)의 백성을 옮겨 이곳을 채우고 패주 창무군이라고 하였다.

 

(요 중경도 흥중부 흥중현) 본래 전한 유성현 땅이었다. 태조가 한(漢)의 백성을 노략질하여 여기에 살게 하며 패성현을 세웠다.

(요 중경도 흥중부 영구현) 패성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요 중경도 흥중부) 통화(983년~1011년) 중 건주, 패주, 의주(宜州), 금주, 백천주를 설치하였다. 적경궁에 예속하였다. 후에 흥성궁에 예속하였다.

 

(요 중경도 흥중부) 1041년 (패주를) 흥중부로 승격하였다.

(원 북경로 흥중부) 1042년 부로 승격하고 지금의 이름<흥중>으로 고쳤다. 금 때 (흥중부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청 내몽골 토묵특부) 요 때 흥중부를 설치하였다.[각주:185]

 

(요 중경도 흥중부 흥중현) 희중(1032년~1054년) 중 흥중부를 설치하면서 (패성현의) 이름을 (흥중현으로) 고쳤다.

 

요 중경도 흥중부

 

  • 4현

 

  1. 흥중현 <옛날 전한 유주 요서군 유성현>
  2. 영구현 <흥중현을 나누어 설치>
  3. 상뢰현 <추가>
  4. 려산현 <옛날 전한 유주 요서군 저려현>

 

  • 2주

 

  1. 안덕주
  2. 검주 <옛날 한 요서군 땅>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광녕현) (평주로 옮겼던 유성현을) 요(遼) 때 광녕현으로 고쳤다.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태조가 정주에서 사로잡은 백성들을 살게 하였다.

 

요 남경도 평주 <요흥군>

 

  • 3현

 

  1. 노룡현 <옛날 한 유주 요서군 비여현>
  2. 안희현 <옛날 한 유주 요서군 영지현> → 천안현
  3. 망군현<망도현> <옛날 한 유주 요서군 해양현> → 해산현

 

  • 2주

 

요 남경도 난주 <영안군>

 

  • 이전 우북평군 석성현 → 요서군 해양현
  • 3현

 

  1. 의풍현 <난주의 치소>
  2. 마성현 <740년 이전 노룡현>
  3. 석성현 <한 우북평군 석성현 → 641년~696년 사이 당 임유현>

 

요 남경도 영주 <인해군> → 금 중도로 평주 창려현에 병합

 

  • 1현

 

  1. 광녕현 → 금 중도로 평주 창려현

 

금 요서

 

이전 현재 이후
요 중경도 흥중부 금 북경로 흥중부 원 대녕로 흥중주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금 중도로 평주 원 중서성 영평로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광녕현 금 중도로 평주 창려현 원 중서성 영평로 창려현
요 남경도  평주요흥군 영주

 

1123년 요 평주절도사 시립애가 항복하였다.[각주:186] 연경 6주의 땅을 반으로 분할하여 유주, 계주, 무주, 삭주 등[각주:187] 연 서쪽 땅을 송에게 주고 마침내 평주에 남경을 설치하였다. 난주에 절도사를 설치하였다.[각주:188]

 

1126년 (남경을) 평주로 되돌리고 군수사를 설치하였다.[각주:189]

 

1132년 남경로 평주 군수사를 동남로 도통사로 고치고 요양부에서 다스렸다. 후에 전운사를 설치하였다.[각주:190]

 

1142년 영주를 강등하여 광녕현에 병합하였다.

 

1153년 전운사와 군수사를 모두 중도로에 예속하였다.[각주:191]

 

1167년 망도현<망군현>의 이름을 해산현으로 고쳤다. 안희현을 천안현으로 고쳤다.[각주:192]

 

1189년 신안진에 무녕현을 설치하였다. 광녕현의 이름이 광녕부와 겹치므로 창려현으로 고쳤다.[각주:193]

 

금 북경로 흥중부

 

  • 옛날 당 영주성이었다.
  • 4현

 

  1. 흥중 <옛날 전한 유주 요서군 유성현>
  2. 영덕
  3. 흥성
  4. 의민

 

금 중도로 평주 <흥평군>

 

  • 4만 1748가구
  • 5현

 

  1. 노룡
  2. 무녕 <1189년 이전 신안진>
  3. 해산 <옛날 망군현=망도현> ⇒ 무녕현
  4. 천안 <옛날 안희현>
  5. 창려 <옛날 영주>

 

금 중도로 난주

 

  • 6만 9806가구
  • 4현

 

  1. 의풍
  2. 석성  ⇒ 의풍현
  3. 마성 → X
  4. 낙정

 

원 요서

 

이전 현재 이후
금 북경로 흥중부 원 중서성 대녕로 흥중주 명 영주위 올량합 태녕위 몽골 토묵특
금 중도로 평주 원 중서성 영평로 명 경사 영평부
금 중도로 평주 창려현 원 중서성 영평로 창려현 명 경사 영평부 창려현

 

(청 내몽골 토묵특부) 원 대녕로 흥중주였다.[각주:194]

 

1215년 천예가 평주를 취하니 금 경략사 걸주가 항복하였다.[각주:195]. 평주를 흥평부로 고쳤다.[각주:196]

 

1260년 흥평부를 평란로로 승격하였다.[각주:197]

 

1265년 (평란로) 무녕현과 해산현을 폐지하여 창려현에 병합하였다. 천안현을 폐지하여 노룡현에 병합하였다. 후에 천안현을 다시 설치하였다. (난주) 의풍현을 폐지하여 난주에 병합하였다.[각주:198]

 

1266년 (평란로에) 무녕현과 해산현을 다시 설치하였다. 난주에 의풍현을 다시 설치하였다. 앞서 석성현을 폐지하여 낙정현에 병합하였는데 이 해 다시 의풍현에 병합하였다.[각주:199]

 

1267년 (평란로) 무녕현과 해산현을 폐지하여 창려현에 병합하였다. (난주) 마성현도 또한 폐지하였다.[각주:200]

 

1270년 (평란로에) 무녕현과 해산현을 다시 설치하였다. 창려현과 해산현을 폐지하여 무녕현 병합하였다.[각주:201]

 

1274년 (평란로에) 창려현을 다시 설치하고 해산현을 여기로 병합하였다. 창려현을 난주에 예속하였다. 창려현은 후에 영평로에 속하였다.[각주:202]

 

1300년 물난리로 인하여 평란로를 영평로로 고쳤다.

 

원 중서성 대녕로 흥중주

 

원 중서성 영평로

 

  • 1만 3519가구, 3만 5300명
  • 1사, 4현, 1주 (2현)

 

  1. 녹사사

 

  • 4현

 

  1. 노룡현
  2. 천안현
  3. 무녕현
  4. 창려현

 

  • 1주

 

난주

 

노룡새 남쪽에 있었다.

 

  • 2현

 

  1. 의풍현 <난주 치소> ⇒ 난주
  2. 낙정현

 

명 요서

 

이전 현재 이후
원 중서성 대녕로 흥중주 명 영주위 올량합 태녕위 몽골 토묵특 청 내몽골 탁색도맹 토묵특부
원 중서성 영평로 명 경사 영평부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원 중서성 영평로 창려현 명 경사 영평부 창려현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창려현

 

1369년 영평로를 평란부로 고쳤다. 난주의 치소 의풍현을 폐지하여 (난주에) 병합하였다.[각주:203]

 

1371년 평란부를 영평부로 삼았다.

 

명 영주위

 

-

 

명 경사 영평부

 

  • 1주 5현

 

  1. 노룡현
  2. 천안현
  3. 무녕현
  4. 창려현

 

명 경사 영평부 난주

 

  1. 낙정현

 

1389년 태녕타안복여3위지휘사사를 설치하고 그곳 두목에게 각각 스스로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며 이로써 서로를 성원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모두 배반하여 떠나갔다.

 

1567년 토만이 계진을 침범하고 창려현과 노룡현을 노략질하며 난하에 이르렀다.[각주:204]

 

청 요서

 

이전 현재 이후
명 영주위 올량합 태녕위 몽골 토묵특 청 내몽골 탁색도맹 토묵특부 청 직례성 열하도 조양부 중화민국 열하성 조양시 만주국 열하성 조양시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 조양시
명 경사 영평부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명 경사 영평부 창려현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창려현      

 

(청 직례성 열하도 조양부) 명 영주위. 후에 (올량합) 태녕위로 들어갔다.

 

(청 내몽골 토묵특부) 1629년 태길악목포와 탑포낭선파가 와서 항복하니 후에 선파를 패륵으로 봉해 좌익을 다스리게 하고 악목포를 패자로 삼아 우익을 다스리게 하여 세습하게 하였다.[각주:205]

 

청 내몽골 탁색도맹 토묵특부

 

순천부의 옥전현과 풍윤현을 영평부에 예속하였다.[각주:206]

 

1737년 명 때의 산해위로 산해관을 설치하였다. 지금 동문이 옛날 유관이었다.[각주:207]

산해위를 폐지하고 임유현를 설치하였다.[각주:208]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건륭(1736년~1795년) 초 산해위를 폐지하고 임유위를 설치하였다.

 

1743년 영평부의 옥전현과 풍윤현을 다시 직례성 준화주에 편입하였다.[각주:209]

 

(청 직례성 조양부) 1778년 조양현을 설치하였다.

 

(청 직례성 조양부) 1904년 (조양현을) 조양부로 승격하여 건창현을 여기에 예속하고 또 3현을 설치하였다.

 

청 직례성 열하도 조양부

 

청 직례성 통영도 영평부

 

  • 직례성 치소 동쪽 800리
  • 1주 6현

 

  1. 노룡현
  2. 천안현
  3. 무녕현
  4. 창려현

 

난주

 

  1. 낙정현
  2. 임유현

 

  1.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2.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3. 사기 주본기 [본문으로]
  4. 사기정의 [본문으로]
  5. 산해경 대황북경 [본문으로]
  6. 진서 북적열전 [본문으로]
  7. 진서 동이열전 [본문으로]
  8. 사기 흉노열전 [본문으로]
  9. 사기 진시황본기 [본문으로]
  10. 통전 [본문으로]
  11. 사기 한흥이래제후왕연표 [본문으로]
  12. 한서 [본문으로]
  13. 사기 [본문으로]
  14. 사기 [본문으로]
  15. 한서 [본문으로]
  16.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1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18. 한서 왕망전 [본문으로]
  19. 후한서 [본문으로]
  20. 후한서 [본문으로]
  21. 후한서 광무제기 [본문으로]
  22.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본문으로]
  2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24. 후한서 [본문으로]
  25.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본문으로]
  26. 삼국지 [본문으로]
  27. 후한서 [본문으로]
  28. 후한서 [본문으로]
  29. 후한서 [본문으로]
  30. 후한서 효화효상제기 [본문으로]
  31. 후한서 [본문으로]
  32. 후한서 [본문으로]
  33. 후한서 [본문으로]
  34. 후한서 [본문으로]
  35. 후한서 [본문으로]
  36. 후한서 [본문으로]
  37. 후한서 효화효상제기 [본문으로]
  38. 후한서 지리지 [본문으로]
  39.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본문으로]
  40. 후한서 효안제기 [본문으로]
  41.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본문으로]
  42. 후한서 [본문으로]
  43. 후한서 효환제기 [본문으로]
  44. 후한서 [본문으로]
  45. 후한서 [본문으로]
  46. 후한서 [본문으로]
  47. 후한서 [본문으로]
  48. 후한서 [본문으로]
  49. 후한서 [본문으로]
  50.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본문으로]
  51.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본문으로]
  52. 후한서 [본문으로]
  53. 삼국지 [본문으로]
  54. 후한서 [본문으로]
  55. 삼국지 위서 2공손도4장전 [본문으로]
  56. 후한서 [본문으로]
  57.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본문으로]
  58. 삼국지 [본문으로]
  59. 후한서 효헌제기 [본문으로]
  60.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본문으로]
  61. 진서 재기 [본문으로]
  62.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본문으로]
  63. 삼국지 [본문으로]
  64. 진서 [본문으로]
  65. 진서 [본문으로]
  66. 진서 제기 [본문으로]
  67. 진서 지리지 [본문으로]
  68. 진서 [본문으로]
  69. 진서 재기 [본문으로]
  70. 북사 열전 [본문으로]
  71. 자치통감 [본문으로]
  7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73. 북사 열전 [본문으로]
  74. 진서 [본문으로]
  75. 송서 [본문으로]
  76. 진서 [본문으로]
  77. 자치통감 [본문으로]
  78.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79. 자치통감 [본문으로]
  80. 진서 제기 [본문으로]
  81. 자치통감 [본문으로]
  82. 자치통감 [본문으로]
  83. 자치통감 [본문으로]
  84. 자치통감 [본문으로]
  85. 자치통감 [본문으로]
  86. 북사 위본기 [본문으로]
  87. 위서 [본문으로]
  88. 위서 [본문으로]
  89. 위서 [본문으로]
  9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본문으로]
  91. 위서 [본문으로]
  92. 진서 [본문으로]
  93. 진서 [본문으로]
  94. 진서 지리지 [본문으로]
  95. 위서 [본문으로]
  96. 위서 [본문으로]
  97. 위서 지형지 [본문으로]
  98.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99.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00.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01.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02. 위서 [본문으로]
  103. 위서 [본문으로]
  104. 위서 지형지 [본문으로]
  105.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06.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07. 위서 [본문으로]
  108. 북사 위본기 [본문으로]
  109. 북사 위본기 [본문으로]
  110. 송서 이만열전 [본문으로]
  111. 양서 동이열전 [본문으로]
  112. 남사 이맥열전 [본문으로]
  113.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으로]
  114. 남제서 [본문으로]
  115. 위서 [본문으로]
  116.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17.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18.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19. 자치통감 [본문으로]
  120. 위서 [본문으로]
  121. 자치통감 [본문으로]
  122.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23.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124. 북제서 [본문으로]
  125. 수서 [본문으로]
  126. 북사 [본문으로]
  127. 수서 [본문으로]
  128. 수서 [본문으로]
  129. 자치통감 [본문으로]
  130. 수서 [본문으로]
  131. 구당서 지리지 [본문으로]
  132. 구당서 지리지 [본문으로]
  133.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134.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35.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36.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137. 수서 [본문으로]
  138. 수서 지리지 [본문으로]
  139.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140. 북사 [본문으로]
  141. 수서 [본문으로]
  142. 수서 [본문으로]
  143. 자치통감 [본문으로]
  144. 북사 [본문으로]
  145. 수서 [본문으로]
  146. 수서 [본문으로]
  147. 북사 [본문으로]
  148. 수서 [본문으로]
  149. 구당서 [본문으로]
  150. 자치통감 [본문으로]
  151. 구당서 [본문으로]
  152. 자치통감 [본문으로]
  153.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154. 구당서 지리지 [본문으로]
  155. 구당서 [본문으로]
  156.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157. 구당서 지리지 [본문으로]
  158. 구당서 [본문으로]
  159. 구당서 [본문으로]
  160. 구당서 지리지 [본문으로]
  161. 신당서 [본문으로]
  162. 구당서 [본문으로]
  163. 자치통감 [본문으로]
  164.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165. 신당서 [본문으로]
  166. 신당서 지리지 [본문으로]
  167. 구당서 [본문으로]
  168. 신당서 지리지 [본문으로]
  169. 요사 지리지 [본문으로]
  170. 신당서 [본문으로]
  171. 신오대사 [본문으로]
  172. 신오대사 [본문으로]
  173. 자치통감 [본문으로]
  174. 요사 [본문으로]
  175. 구오대사 [본문으로]
  176. 자치통감 [본문으로]
  177. 구오대사 [본문으로]
  178. 구오대사 [본문으로]
  179. 요사 [본문으로]
  180. 자치통감 [본문으로]
  181. 구오대사 [본문으로]
  182. 구오대사 [본문으로]
  183. 신오대사 [본문으로]
  184. 구오대사 [본문으로]
  185.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186. 금사 [본문으로]
  187. 금사 [본문으로]
  188. 금사 지리지 [본문으로]
  189. 금사 지리지 [본문으로]
  190. 금사 지리지 [본문으로]
  191. 금사 지리지 [본문으로]
  192. 금사 지리지 [본문으로]
  193. 금사 지리지 [본문으로]
  194.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195. 원사 [본문으로]
  196.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197.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198.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199.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200.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201.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202. 원사 지리지 [본문으로]
  203. 명사 지리지 [본문으로]
  204. 명사 [본문으로]
  205.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206.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207.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208.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209. 청사고 지리지 [본문으로]

'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동군 연표  (0) 2017.07.13
현토군 연표  (0) 2017.05.06
대방군 연표  (0) 2017.04.29
낙랑군 연표  (1) 2017.04.25

+ Recent posts